지금은 釜山, 大邱, 馬山, 昌原에 비해, 아니, 金海보다 작은 도시가 되어버렸지만
내 고장 밀양은 4∼50년 전만 해도 주위에 위치한 양산, 창녕, 울산, 김해는 비교될 바가 못될 정도로 제법 한 곳이었다.
고을의 유래나 물산(物産), 행정기능과 문화적 전통 ㅡ 그리고 교통문제 등...
어느 한 부분 치우침 없었다. 역설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어찌보면 발전 안되기가 천만다행일 듯도 싶다.
김해나 울산처럼 되었으면 그나마 지금 남아있는
밀양의 자연은 눈 뜨고도 못 찾을 일.
그런 밀양에, 삼문뜰에 아지랑이가 아직 아른거리던 그 시절의 밀양에,
"극장"과 관련된 재미나는 숨은 이야기가 있었으니... ▶▶
6.25전쟁 끝의 구제품이 아직 인기가 있던 그 시절, 미국공보원(USIS)에서 배급하여 상영하던
"리버티늬우스"가 그 어느 인기 드라마보다 재미있던 당시에 , 우리 고향에는 문화시설이 들어섰다.
이름하여 한양극장(漢陽劇場) ㅡ 지금의 제일극장의 전신(前身)이다. 오포(午砲)가 불어야 점심때임을 알던 그때 새로 등장한 문화시설 덕분으로 이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흐름이란 - 저녁밥 먹을 때를 시작으로 성내(城內) 사람들한테는 ‘간에 바람이 들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이랬다......... ♬비둘기가 울던 그날에...♪......♪눈보라가 치던 그 밤에...♩어린 몸 갈 곳 없어...♬ 한양 극장 지붕 위에 설치된 확성기에
가는 봄 오는 봄의 주제가가 울려 퍼진다.
영 냄비 알에 사는 순자도, 해천 도랑 아래에 사는 용 말이도 동문안에 사는 옥이 이모도 간에 바람이 들고,
삿개, 못골, 대거리, 북성껄. 신당 만 리, 범북 고개, 소정껄, 남포리....
배 끝 마당 김생원 집 머슴도, 그 집 담 넘어 사는 당숙 아재도 궁둥이 들썩거리기는 마찬가지.
긴 담뱃대를 들고 인사성 없는 아이들을 가차 없이 혼쭐을 내던 삼문동의 배 초시네 집 딸은, 아예 머리에 수건을 둘렀다.
제 딴엔 간 큰, 마흘리의 설 씨네 집 건달도 같이 뛴다. 김승호, 황정순, 도금봉, 허장강... 모습이 눈에 선하다.
최남현, 황해, 문정숙, 최은희, 조미령, 이민, 박암...... 그때의 배우들은 어찌 그리 잘났던지....
(못생긴 조석근과 秋夕陽이란 배우도 있긴 했다) 지난주에는
《육체의 길》이라는 영화가 있는 눈물 없는 눈물 다 짜내더니...
또 그 전에는 《느티나무 있는 언덕》이라는 영화에서 영화 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꼬마 배우 "안성기"는 지금은 중견배우가 되어있다 해도, 그때까지만 해도 코흘리개였다.
도무지 궁둥이 방바닥에 대고 앉아있을 수가 없는 선불 처녀들은 엄마 몰래 쌀 됫박 퍼내어 돈을 바꾸어가지고는 아예 "칠성 다방" 옆에 쪼그리고들 앉았다. 그랬다. 극장은 그 시절의 낭만이요,
삶의 한 단면이었다. 사랑도 생겨났고 애환도 피어났던 밀양의 극장은 1960년대를 맞으며 큰 회전을 하기 시작한다.
宋모씨가 남 보극장을 지었다. 한양 극장이 너무 장사가 잘되었기에 "같이 먹고살자...
" 외치며! 남 보극장은 개봉 영화의 제목을 이렇게 골랐다. 노/다/지....
!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남 보극장의 개관기념 상영프로의 제목이 그랬다.
이젠 남 보극장이 "노다지"를 잡는다는 선포였을까... ▶▶ 남보극장이 개관을 하자 한양 극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운영에 큰 타격이 왔다. 그저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던 한양극장 吳사장님은 드디어 칼을 뽑았다.
길다면 긴 시간을 남 보극장에게 선두 자리를 양보해오던 한양 극장은 제일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다.
교묘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애써 꾸며낸 연출이었을까...?
신장개업한 제일극장의 개관기념 상영프로의 제목은 추/격/자...! 였다. 「
노다지 너무 좋아하지 마라, 여기 추격자가 간다」였을까. 그
러고만 말았다면 내가 여기에 글을 쓸 재미가 없겠지. 밀양 사회에서 그래도 내로라하던 白 아무개 씨는
吳사장과는 처남 남매 사이이다. 두 극장이 잘 되는 것을 보아오던 白 아무개 씨 ㅡ
《지금부터 三門洞과 역전 손님은 내 거다..!》하며 차린 극장이 삼문동의 삼영 극장이다. 밀양의 극장 야사는
여기서 관객들을 졸도하게 만든다.
제일, 남보 두 극장은 규모나 기득권 차원에서 삼영 극장이 시비를 걸 위치는 아니라 해도 소도시에서 극장이 세 군데면
많으면 많았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 택한 제목이었을까..?
마침이면 군사혁명정부의 홍보영화쯤으로 제작된 영화였을까? 영화 제목이 절묘하다. 들어보시라....! 삼영 극장의 개관기념상영프로 제목은 산아제한(産兒制限)이었던 것이다. ▶▶ -
먼저 차려 벌어먹는 곳이 잘 나간다고, 딴죽걸기로 걸 어제 낀 후발주자가 "노다지"판 벌여 한 동안 재미 좀 보나 했더니... - 선수를 뺏긴 측에서는 미안하지만 그리는 못한다며 "추격자"되어 다시 따라잡는 와중에, (어부지리라도 얻어지려나...?) 해도 너무 많은 게 아니냐...! 하며- 고양이 쥐 생각하듯 한 곳에서는 이만 "산아제한"하자고 갖다 붙인 꼴의 극장 세 군데의 대 연출이
밀양의 극장 야사올시다
하나도 더 붙이고 뺀 것이 없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만 모르는 ㅡ
밀양이기에 있을법한 이 이야기는, 지금은 아련한 추억의 한 모퉁이로 밀려가버렸습니다.
내 고향 밀양사람끼리라서 하는 말이지만... 하이 튼... 밀양은 별난 동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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