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김관환)이 쉬고 즐기면서 공부하는곳입니다
虛空의休遊靜舍

◈ 허공의 관련방 ◈/▷허공의 추억여행 85

60년대 하꼬방 촌 풍경-새끼줄 연탄과 시멘트포대 봉지 보리쌀

지금은 사라지고없는 서면입구(가야-신암-서면 3거리) 시외버스 정류장. 60년대에는 여기가 내륙경남 서부경남버스들이 부산을 올려면 전부가 여기를 통과한다. 그리고는 교통부 로터리 충무동 시외버스 정차장(종점)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는 지게꾼(짐꾼)들의 주 생활터전이라 대략 30 여명이 주둔한다. 대게가 시골에서 부산으로 이주한 직업없는 가장들이 대부분이다. 서울가는 칙칙푹푹 기차기 기어가는 오후 4시쯤이면 부인들이 이곳으로 온다. 남편들이 짐을 날라주고 얼마만큼 번 남편들은 부인에게 기분좋게 번돈을 전한다. 그러면 그 얼마의 받은 부인들은 가야시장으로 가나 그렇지 못한 부인은 그냥~~~ 그때부터는 짐 운반이 한푼도 벌지 못한 짐꾼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그렇게 늦게나마 몇푼을 번..

6.25전쟁 중 버려진 군복을 염색한 교복과 군용워카의 추억

염색한 군복의 교복과 군용 워커의 추억 염색한 군복의 교복과 군용(군화)워카의 추억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는 염색한 군복과 군용워카의 인기는 대단했다. 한국전쟁이 1953년 휴전 후에 국제시장에는 얌센몬 군용이 넘쳐났다. 군용 물통과 탄대(띠)는 등산용으로 사용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군복과 군화가 단연 최고의 학생 멋쟁이다. 지금 부산진구 신암 일대 즉 경부선 옆이 군복 염색의 메카였다. 군용은 단속이 심해 염색을 해도 헌병이나 MP에게 적발되면 빼낀다. 학생 워커는 부산의 명문 경남고등학교 학생들의 트레이드 마크다. 우리 반에도 몇 명은 부모가 마련해준 사지 교복과 군용 학생복(염색)을 바꾼 애도 있었다. 미군들에 맞게 만들어진 헐렁한(일부는 우라까이) 교복에 앞부분이 헤어진 워카~~~ ..

60년대 부의 상징은 백색전화! 전화 하나가 서울양옥 집 한 채 값

우리들은 모임에 가거나 첫 대면 때는 명함을 주고받는다.. 그가 누군지 어느 회사 다니는지를 보는 것보다는 전화가 몇 대 인지 본다. 그리고 집전화번호가 있는지를 본다. 60년대 회사의 규묘는 전화가 몇 대 인지가 좌우한다. 60년대 집 전화는 부의 상징 바로 그것이다. 이 전화기가 60년대 당시 백색전화라고 해서 거의 집 한 채 값이었다. 하지만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전화가 엄청 귀했다. 매매가 가능한 백색전화는 1978년 260만 원까지 갔다, 당시 서울시내 50평짜리 한옥 집값이 230만 원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전매가 허용된 백색전화는 거품이 많았지요. 전매가 허용되지 않고 신청해서 설치되기를 10년 정도의 오랜 기간 기다려야 했다. 청색전화는 가격이 그리 높지 않지만 세월이 약이다 하고..

깡통커피를 [미국 보약] 이라고 마신 우리네 그 시절

지금부터 50년도 더 먼 옛날~~ 월남전쟁이 막 시작되고 우리나라는 비 전투부대를 파병할 때 우리의 젊은이들이 강제보다 지원하여 너도 나도 월남으로 가다. 그 전쟁이 한참 불붙을 때인 6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정예 전투부대 청용 맹호부대들이 파병하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 국립묘지 장군묘역을 놔두고 사병묘역에 잠들다. 내 고향 시골 대사동에서도 많은 친구 후배들이 월남으로 떠났다. 그 이유인즉 주월사령부에 고급장교로 간 그 형님 덕(?)에 말이다. 우리 동네 출신 파병자들은 그래도 격전지보다는 좀 편한 곳으로~~~ 뒷 담장에 대나무로 만든 티브 안테나가 걸린 집, 마루 모퉁이에 냉장고가 있는 집, 어르신들이 양담배 던힐을 몰래 숨겨 피우는 집. 아이들이 깡통에든 초콜릿 사탕..

밀양 하남 대사국민학교 36회 졸업생들

1965년 8월 5일 45년보다 더 먼 추억 - 아~어찌 잊으리 우리 이 날을! 그 당시는 학교를 졸업하고 4년 되는 해에 첫 동기회를 개최하는 것이 관례이다. 아마도 그 동안 졸업하고 모두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당시 동기회 추진위원(?)으로 김재환 김상남 박순 특 박정득 김관환. 여름방학 때라 가사를 도와야 할 시기에 초등학교 교무실에서. 서 툴은 솜씨로 회칙 만들고 알림판을 등사기에 등사하는 고생을 했다. 회비는 당시 화폐개혁으로 몇 원으로 기억한다. 지금같이 당일 갖고 오는 게 아니고 각 동네마다 받으러 다닌다. 낮에는 논밭으로 일 도우러 가고 없으므로 밤에 찾아간다, 남전에 전병도 전영희 집에 회비 받으러 간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저녁 먹고 재환 나 상남이 셋이서 덕동 뒷산(순희 또희 집..

평생의 숙제를 남기고 떠난 여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더 크면 하자" 초등학교 5학년 때 예쁜 여선생님이 전근 왔다. 우리 집은 학교 근처에 있어 학교 운동장이 바로 우리들의 놀이터다. 특히 학교의 우물이 깊어서 여름이면 찬물을 뜨어 곧장 학교 우물을 찾는다. 여름방학을 맞은 그 날도 엄마가 오이 멱국 만든다며 찬물을 떠 오라 하여 학교 우물을 찾았다. 그때는 방학인데도 그 여선생님은 당직하면서 자기 반 미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화 작업이 힘들었든지 물을 떠 가는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책상과 의자를 포개 그 위에 내가 올러 가서 높은 곳에 그림을 붙이는 일이다. 밑에서 흔들리는 책걸상을 꼭 잡고 있던 선생님이 킥킥 웃고 있었다. " 아이고 00이 어른이 다 되었네" 사리마다도 없이 삼베 땅 주봉을 입은 내 것을 본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중학생이..

해수욕장 유감(쌍놈의 집으로~~~)

시골 우리 동네 한 목 할아버지 애기다 때는 1960년대다.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키운 막내딸이 부산으로 시집을 가다. 평소 효심이 강한 이 딸의 강한 효심이 화를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다리가 안 좋을걸 아는 이 딸이~~ 수산 강변 모래찜질하며 아픈 다리를 치료하든걸 본 딸이, 바다가 모래에 찜질을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싶었다. 이 딸이 일장의 장문 편지로 아버지를 부산으로 오시게 했다. 당시만 해도 이 할아버지 갓 쓰고 두루 막 한복을 입고 보고픈 딸 집으로 오다. 딸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살고 있다. 다음날 소위 피서랍시고 먹을 것 준비하여 모두들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가다. 날씨는 덥지요 했볓은 내리쬐지요 한복 입은 할아버지는 죽을 지경이다. 바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가지고 온 음..

60년대 하꼬방촌 풍경-5 동퍼요 (똥 퍼요)

"똥퍼요" 하는 그 소리가 그립다 아침에 헬스 하려 나오는데, 골목에 정화차 두 대가 와서 동영이 집과 용이 집 정화조 청소를, 아니 정확히는 흡입을 하고 있다. 정화조차를,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똥차다. 요즘은 화장실이 다 수세식이 되어서 자신이 배출한 대변을 볼 일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자신이 배출한 대변을 꼭 한번 봐야 했습니다. 더우기 볼일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소리로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그 곳에서는 산 언덕의 적당한 곳에다 구멍을 파고 그 위에 널판지를 덥어서 발판을 만들고 그리고 거적을 덥거나 판자로 집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그야말로 대총 만들어 놓고 뒷 일만 처리하게 하였다. 시골에야 대변을 받아 모았다가 농사철에 밭에 뿌려서 밭에다 주는 일종의 거름이었지만 산언덕 사는 사람들..

60년대 하꼬방촌 풍경-4 먹는물의 전쟁과 사람사는 훈훈함

돈을 물쓰듯한다~~~ 이 말은 돈을 흔하게 아무렇게나 사용한다는 말이겠지요. 이제는 물을 돈 쓰듯 해야 합니다 요새는 주부들이 싱크대에서 물을 뿌리며 그릇을 씻지요. 화초나 정원에 물 뿌리게로 물을 뿌리는 모습을 티브나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지요. 또한 공중목욕탕에서는 물을 흘려놓고 양치질이나 면도를 하는 것도 자주 봅니다. 산비탈 판잣집 생활의 70년대 이전에는 물이 돈보다 더 귀했습니다. 당시 물 한 바케스(통) 면 3일은 물 부자가 되는 시절이었답니다. 시내 공동수도가에는 물통이 장사진을 이루고 차가 들어가는 고지대는 물차가 다녔죠. 공동수도전도 물차도 못 오는 산비탈은 산비탈 옹달샘을 이용합니다. 요새 말로 아침에 운동을 하며 물 길러 가는 약수터라고 하면 될까요? 이것도 집에서 노는 식구라도 있..

점심시간이 되면 난 빈 벤또를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가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어렸을 적엔 일제강점기를 지난지 얼마 안 되었던 관계로어른들이 일본말 이름을 자주 사용하였지요. 후리시끼(책보자기)와 벤또(도시락)가 가장 자주 사용하던 일본말 이름입니다. 옛날 학창시절 추억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깃거리가 선생님 몰래 도시락 까먹던 것이리라. 체육시간이면 장난꾸러기 남자애들 잠입해서는 여자애들 도시락을 까먹고 대신, 개구리며 지렁이를 잡아다 넣어두어 여자애들을 까무라치게 만들기도 했었답니다. 겨울철엔 난로 위에 도시락을 얹어놓아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누릉지 냄새와 신김치 익는 냄새가, 교실안에 가득차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었답니다. 도시락과 책을 함께 책보자기에 싸서 팔에 올려놓고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건, 도시락에 함께 넣은 김치국물이 쏟아져서 책을 적시는 일이 없도록 하기 ..

아! 생각난다 그 강가 그 학교 -잊지 못할 내 모교여 영원하라~~!

이 사진을 보니 솔직히 마음이 찡하다. 1961년 청운의 꿈을 가지고 들어선 동명중학교 교사의 일부분으로, 우리가 1학년 3 학급이 공부하던 3칸짜리 독립된 건물이다. (1A는 졸업 시는 3A로사용) 평년에는 신입생이 고작 2 학급이었으나 이해는 진학자가 많아 3개(남 2 여 1) 학급이다. 예외는 있겠지만 47~49년생으로 부모님들이 해방되었다고 마음 놓고 으음~아~ 한 결과다. 교실이래야 구멍이 군데군데 있어 낙동강 바람과 모래가 동시에 교실로 돌격하던 그런 교실.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저 그런 분위기에서 과목마다 선생님이 바뀜이 신기하기만 했고, 시험 칠 때는 교실을 바꿔가며 학년 구별 없이 같은 책상에 앉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도 우리는 배우겠는 그 하나만으로 선생님의 입과 칠판에서 눈을 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