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오륙십 년 전에 나온 노래라면 누구든 그것을 '흘러간 옛 노래'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미 흘러간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노래 가운데에는 의외로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래도 그 모습을 바꾸어 가며 계속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황성 옛터'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荒城의 跡'은, 그렇게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며 흐르고 있는 노래의 생명력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30년대 초에 나온 다른 많은 유행가들처럼, '황성의 적'도 이미 막간무대 공연을 통해 발표되어 유행하고 있던 것이 1932년에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제목 그대로 황폐한 옛 성터의 자취를 더듬는 진한 회고조 분위기의 가사는 왕평이 지은 것이고, 가사와 꼭 들어맞는 애잔한 곡조는 전수린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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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리수 |
첫 취입은 인기 연극배우인 동시에 유행가 가수로도 크게 활약한 이애리수가 했으며, 바로 같은 해 말에는 역시 배우겸 가수였던 윤백단이 두 번째 '황성의 적'을 태평레코드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1932년 말부터 음반을 내기 시작한 폴리돌레코드에서는 제목을 '고성의 밤'으로 바꾸어 이경설이 노래한 것을 이듬해에 발매했는데, 이경설도 역시 이애리수 못지 않게 인기를 누리던 배우겸 가수였으며 비극에 특히 뛰어나 '비극의 여왕'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 시각으로는 '황성의 적'이 너무 소극적이고 퇴영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게 힘없는 넋두리조차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시대의 상처를 정확히 자극했기에, '황성의 적'에 대한 당시 민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러한 사정을 의식한 탓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황성의 적'은 일제시대에 탄압을 받은 대표적인 금지곡으로 알려져 왔다.
30년대 당시 활동하던 가요계 원로들의 회고담을 들어 보면 분명 '황성의 적'이 마음놓고 어느 무대에서나 부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내용을 감시하기 위해 온 순사들이 걸핏하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중단시키곤 했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가수나 작가를 들볶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2년에만 두 차례나 발매되었는데도 1935년까지의 금지곡을 수록한 목록에서는 '황성의 적'을 찾아 볼 수가 없고, 1938년에는 되려 이애리수의 재발매 음반까지 나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30년대 말까지는 '황성의 적'이 공식적인 금지곡은 아니었던 듯하며, 오히려 꾸준히 유행한 인기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제목이 바뀌어 이경설의 노래로 발매된 '고성의 밤'이 치안방해를 이유로 음반이 압수되는 조치를 당했다는 기사가 1934년 6월 19일자 조선일보에 나오므로, 이후 '황성의 적'이 금지곡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1945년 광복은 유행가의 역사에서도 확연한 분기점이 되는데, 일제시대와 함께 흘러가 버린 많은 유행가들과는 달리, '황성의 적'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인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다만, 이 무렵부터 몇 가지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1942년에 나온 잡지에서만 해도 분명 '황성의 적'으로 표기되고 있던 제목이 이후 조금씩 '황성 옛터'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가사 첫 구절인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에서 '황성 옛터'라는 제목이 연상된 것 같은데, '눈물 젖은 두만강'이 '두만강 푸른 물'로도 통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 하겠다.
또한, 첫 취입자인 이애리수가 1935년 이후로 사실상 연예 활동을 중단한 이후, 다른 가수들 가운데 특히 남인수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많이 부르자,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은 점차 잊혀지고 남인수가 부른 '황성 옛터'가 대신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생전의 이애리수
경기도 개성 출신인 이애리수의 본명은 이음전. '애리수'라는 예명은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애리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우로 활약하면서 막간 가수로도 활동하던 이애리수는 소박한 창법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세때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황성옛터'로 국민가수로 등극한다.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는 고려 옛 궁궐인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을 노래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던 국민들의 마음을 적셨다. 특히 '황성옛터'는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대중가요로 평가받기도 한다.
1931년 '메리의 노래', '라인강' 등의 노래를 담은 음반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한 이애리수는 다음해 '황성의 적'이라는 이름의 음반을 발표했고, 이 음반은 5만장이라는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5만장은 현재 기준으로 500만장에 육박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노래를 통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상기할까 걱정된 일본 경찰이 이 음반을 발매금지 시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애리수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이애리수는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학생이던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동필씨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딴따라' 취급 받던 가수와 엘리트였던 대학생의 현격한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자며 독약을 먹고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구출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은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를 부르고, 그의 애처로운 노래를 들은 배씨의 부모는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한다. 가수 출신임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 결혼 승낙의 조건이었다.
이애리수는 결혼 이후 2남 7녀를 낳아 기르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맏아들조차 어머니가 '황성옛터' 가수라는 사실을 대학생이 된 이후에야 알았을 정도였다.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비록 이애리수는 70년 넘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가 부른 '황성옛터'는 이후 수 많은 후배 가수들의 입에 올라 아직까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은퇴한 뒤 소식이 끊어지며 한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오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09년 3월 3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자료출처:http://www.youtube.com/watch?v=7TbZVQG2kNc |
1959년의 문화영화에 실린 남인수 선생의 황성 옛터
남인수 생전에 노래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59년작 문화영화를 보면, 30년대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과 50년대 남인수의 '황성 옛터', 그리고 현재 불리는 있는 '황성 옛터'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여 그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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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荒城)의 적(跡) 가사지 |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지어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닫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荒城)의 적(跡) - 이애리수 >
위에 적은 30년대 '황성의 적' 가사와 남인수가 부른 50년대 '황성 옛터' 가사를 비교해 보면, 부분적으로 세세하게 다른 곳이 몇몇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거의 같다. 그러나, 현재 불리고 있는 '황성 옛터' 가사는 이와 큰 차이가 있으니, 1절 마지막 두 구절인 '아 외로운... 눈물 지어요'와 2절 마지막 두 구절인 '아 가엾다... 헤매어 있노라'가 뒤바뀌어 있다.
60년대 이후 어느 시점부터 1절과 2절이 섞여 버린 것이다. 곡조 면에서도 각각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전주와 간주는 시대에 따라 모두 다른 것이 뚜렷하고, 본 곡조에서도 약간 변한 부분이 있다. 이 경우는 가사와는 달리 50년대와 현재가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각절 세 번째 구절 말미, 즉 '홀로 잠 못 이뤄'에 해당하는 대목에서 '황성의 적'과 '황성 옛터'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1932년 첫 음반이 나올 당시 '황성의 적'과 현재 통상 불리고 있는 '황성 옛터'를 비교해 보면,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제목, 가사, 곡조와 노래한 가수에 대한 인식까지 많은 점이 달라져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흘러간' 노래가 아니라 '흐르고 있는' 노래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변화는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유행가의 유통형식이 음반이라는 매체를 뛰어넘어 민요처럼 구전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한 시대의 유행가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퇴폐니 왜색이니 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황성의 적', 즉 '황성 옛터'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 대해 우리 민중들이 보내는 암묵적인 동의의 표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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