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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26 윤심덕 사의찬미

허 공 2018. 3. 31. 16:14

 

윤심덕, 死의찬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Andre Rieu - Danube Love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 (Ivanovici, Josif.1845년출생)의
도나우강의 잔물결 (Donauwellen Walzer)이라는곡입니다. 
이 곡에 윤심덕이 사랑한 ...김우진이 가사를 붙여 ‘사의 찬미’ 가 되었습니다.

 

 

1926.8.3 '사의 찬미'의 마지막 밤

 

1926년 8월 3일 윤심덕의 마지막 밤
자료출처: http://nasanha.egloos.com/10758156

... 1926년 8월 3일 밤 11시 관부연락선이 기적을 울리며 시모노세키항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다음날 새벽 한 1등실 선실 문이 열려 있던 것을 보고 방안에 들어간 급사는 선실 안에서 "이 짐을 모처로 부쳐 주시오."하는 메모와 그 위에 단정히 놓인 팁을 발견한다. 배는 멈추고 깊이 잠들어 있던 선실 전부에 불이 밝혀진 채 선원들은 인원파악에 들어갔다. 하지만 1등객 손님 두 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성악가 윤심덕, 목포 대부호집 장남이자 극작가였던 김우진이었다.

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했던 윤심덕은 바야흐로 뭇 유학생 남성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폭풍의 진원지였다. 홍난파도 그녀에게 구애했고 '망향' '그리워' 등 가곡의 작곡가 채동선도 그랬다. 윤심덕은 자신도 호감이 가는 상대와는 거리낌없이 연애에 빠졌지만, 자신이 싫은 사람은 칼같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녀에게 반해 상사병으로 정신줄까지 놓은 사람을 두고 윤심덕은 "자기가 실성을 하면 했지, 내가 그것 때문에 왜 그 사랑을 받아 주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던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얄미운 소리.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소리.


귀국 후 잘나가는 성악가 윤심덕의 자유로운 연애 행각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드는 화제였다. 을지로 일대의 땅부자이자 유명한 친일파이면서 장안에 소문이 짜한 호색한 이용문과의 스캔들은 천하의 윤심덕도 조선에서 버틸 수 없게 만들었고 하얼삔에서 한참을 은거해야 했다. 이즈음 사귀던 일본 여성을 백혈병으로 잃고 상심에 잠겨 고향에 돌아와 있던 김우진과 서로를 위로하며 정을 쌓는다. 하지만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1926년 6월 김우진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를 거부하고 예술을 하겠다며 윤심덕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얼마 후 윤심덕도 일본에 나타났다. 이유는 미국으로 유학가는 동생을 배웅하고 일본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26곡 계약이었는데 윤심덕은 한 곡을 더 녹음할 것을 고집했다.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이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 반주를 하여 녹음된 노래, 이것이 '사의 찬미'였다. 녹음이 끝난 뒤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전보를 친다. "달려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소." 김우진은 달려왔고 둘은 관부연락선을 탔다. 1926년 8월 3일 밤이었다.

영화 '사의 찬미'에서 주연을 맡았던 장미희가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긴 말이 그 유명한 '아름다운 밤이에요.'다. 1926년 8월 3일 밤, 관부연락선 선교에 섰던 두 남녀에게 그 밤은 어떤 밤이었을까. 사람들은 윤심덕은 김우진은 많은 남자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했고, 김우진도 윤심덕에게 목숨 걸지 않았다 했는데 왜? 그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특히 윤심덕은 특히 지쳐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가 100명 중에 0.4 명도 안되던 시절, 그녀들에게 조선은 식민지 조선은 질곡 그 자체였다. 윤심덕의 단짝이었던 박인덕은 이화학당 선생을 하다가 허울만 그럴 듯했던 부잣집 청년에게 시집을 갔지만 끝내 해로하지 못하고 자신이 위자료를 주고 이혼하는 진풍경을 연출했고, 또 하나의 단짝 김일엽은 몇 번씩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머리를 깎고 수덕사 여승이 되었던 것에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성악가로서 일가를 이룬 윤심덕이 "이용문과 바람난 년"으로만 대중에게 각인되었을 때, 자신의 '수준'에 맞는 남자를 고르려면 거의 틀림없는 후처나 첩으로 살아야 했고, '보통' 집안에 시집가면 아마도 숨막혀 죽었을 시대에, 윤심덕의 심경을 헤아려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사의 찬미'를 추가로 녹음하자고 고집할 때 이미 그녀는 자살을 결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취입된 첫 조선어 노래이며, 최초의 대중가요로 꼽히는 이 노래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난 한 재기발랄한 여인의 유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라고 알려진 것은 가사는 영화 <오발탄>에서 최무룡이 읊조린 가사이지 원곡의 가사가 아니라고 한다.  (이를 지적해 주시고 원 가사를 알려 주신 분께 감사) 윤심덕이 구슬프게 부른 노래의 가사는 이것이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2.3절 생략)

 

       참고자료: 1.사의찬미 김정동 묵원대교수 http://pmcstar.tistory.com/103

 

배호 사의찬미

 

김정호 사의찬미

출처 : 부산촛불방송
글쓴이 : 부산촛불방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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