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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26 홍난파 울밑에선 봉선화

허 공 2018. 3. 31. 16:14

홍난파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D%99%8D%EB%82%9C%ED%8C%8C

홍난파(洪蘭坡, 일본식 이름: 森川潤 모리카와 쥰[*], 1898년 4월 10일; 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활동하였는데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과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중락_

 

 

 

 

 

 

 

 

 

 

자료출처:http://blog.daum.net/reed45/16163626

1926년 홍영후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으로,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

 

 

    봉 선 화

    - 김형준 작사,홍난파 작곡/노래 김천애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미국 LA의 인터넷 사이트 KOREA MONITOR에 가면 6.25 첫 뉴스를 전한 위진록 아나운서님의 칼럼이 연재되어

    있고 그 가운데 (55) 클래식 초대석에 봉숭아’? ‘봉선화(鳳仙花)’?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 있습니다.  써 놓으신 긴 내용을 요악하면 ‘봉선화(鳳仙花)’는 봉선화이지 봉숭아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위진록님이 10년전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봉선화가 방송될 때 그 곡을 봉숭아라고 소개 해 달라는 담당 PD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데서 연유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당연한 말씀이라고 다음과 같은 댓글을 썼습니다. 위 선배님 안녕 하셨습니까? 이 글 잘 읽었습니다. 홍난파선생님의 노래를 봉선화라고 하는데는 이의가 없다고 봅니다. 위 선배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봉숭아는 원래 우리말로 쓰던 꽃 이름이었지만 홍난파, 김형준선생님이 그 노래에 봉선화라는 이름을 붙여

     불려진 이래 모두들 그 노래를 봉선화라고 하지 봉숭아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꽃 이름은 봉숭아 일자라도 노래는 봉선화입니다. 위 선배님 말씀이 저는 옳다고 생각하며 봉숭아라고 하는 젊은이가 있으면 바로 잡아 주어야 된다고 봅니다. 제가 쓴 댓글을 옮겼습니다.

     

     

    홍난파작곡 민족의 노래, 봉선화인가. 봉숭아 인가.

     

     

    일제 강점기 1920년 홍난파선생님이 "애수"에 곡을 붙여 연주하던 그 가사를 동료음악가 김형준 선생님이 봉선화 노랫말을 써서 봉선화라는 노래가 탄생했고 그로부터 봉선화는우리 마음속을 파고 들었습니다. 1940년 조선일보가 실시한 신인 음악회에서김자경등과 함께 음악가로 데뷔한 천재 음악가 김천애가 1942년 일본 무사시노

    [武藏野]음악학교 4학년때 히비야 공회당의 ‘전 일본 신인음악회’ 에서 통큰 마음으로 이 봉선화를 불러 큰 반향을 일으 키면서 민족의 한을 담은 이 노래는 더 빠른  속도로 전파되면서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연을 안은 이 봉선화를 요즈음 봉숭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가. 봅니다. 굳이 그렇게 부르겠다고

    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한글 학자도 아니고 문법애 조예가 깊지도 않아서 이런방면으로는 애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홍난파선생님이 작곡한 그 곡에김형준선생님의 가사를 붙인 그 노래는 분명 봉선화이고 그렇게 불러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송전파를 타왔고 레코드가 제작되어 보급 되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에 금지곡이 되었어도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르며 울분을 새겨왔습니다. 거기에서 민족감정이 솟아났고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 힘이 되었습니다. 홍난파선생님을 친일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봉선화가 친일적인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나 봅니다.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이 일제 강점기에 살아 보았는지? 또 그 시절에 살았다면 그분들 어떻게 사셨을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비단 홍난파 선생님뿐만 그 시대를 살아오신 많은 선열들이 겉으로 나타난 항일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굳은 민족의식으로 피압박민족의 서러움을 달래주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던 그리고 동포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며 동포의식을 심어주던 그 분들을 모두 친일파다. 친일행위다. 라고 배격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또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문화를 누가 계승 발전시켰겠는가를. 생각 해 봅니다.제가 우리민족에게 어려움을 주면서 친일행각을 한 사람들까지 옹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친일기준은 오늘의 상황에서만 보는 기준이 아니라 36년간의 피 압박 민족으로 살던 그때의 상황을 고려한 기준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시절에 우리 동포들이 즐겨 부르며, 들으며 마음을 달래던 그 노래들을 골라 이곳에 올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출처 : 부산촛불방송
글쓴이 : 부산촛불방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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