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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35 이난영 목포의눈물

허 공 2018. 3. 31. 16:15

  이난영씨가 18세 때인 1934년도에 데뷔하면서 취입한 '목포의 눈물' 원곡입니다. 전반부에 나오는 곡은 쥬까뮤직스에서 원곡의 템포를 33% 늦춘 것으로서, 당시 이난영씨가 전국을 다니며 부른 목소리와 노래가 어떤 상태였는지 실제로 짐작하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원곡을 디지털 작업하여 새로 완성해낸 곡입니다. 어린시절 가설극장에서 악극단에 의해 불려지던 이난영씨의 '목포의 눈물' 노래를 기억하며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곡은 이난영씨가 1934년도에 취입한 '목포의 눈물' 원곡입니다. 비교자료로서 올렸습니다. 그 당시 발표된 곡들을 보면 대개의 노래들이 이런 식으로 빠른 곡들인데 그 이유는 유성기의 돌림판 속도 때문에 그렇게 빨리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유성기의 돌림판 속도를 천천히 돌게 하면 음질이 이상하게 되고, 돌림판의 회전속도도 일정하게 돌지 않게 되어 소리가 이상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술 수준이 낮았던 시대였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요.. 유성기의 돌림판은 모터의 힘으로 돌리는 전기식이 아니라, 강철판 태엽의 복원력을 이용하여 돌리는 방식이라...

이난영 - 목포의 눈물 (1934. Jukamusics & Original Version)

자료출처:http://www.youtube.com/watch?v=1bIl-LF0fBs

 

1960년 이난영 묵포의눈물

 

 

 

 

 

 

 

 

 

 

 

'목포의 눈물' 이난영 추모사업 추진

목포문화연대, 묘지 이전과 기념관 건립 등 제안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25418

 

 

정거배 (jgb82) 기자

'목포의 눈물'로 널리 알려진 가수 고 이난영의 묘를 고향으로 이전하는 것을 포함해 범시민차원에서 추모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남 출신인 이난영은 중년 이후 세대들의 애창곡인 '목포의 눈물' 뿐 아니라 '목포는 항구다' '해조곡' 등 일제하에서 민족의 한을 노래해 대중가수로서 유명세를 치렀다.

그는 일제치하와 6·25 동란의 격동기를 관통하면서 대중적 찬사를 한 몸에 받기도 했지만, 지난 65년 48세라는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생전의 대중적 인기와는 정반대로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공동묘지에 관리되지 않은 채 무연고 묘지로 초라하게 방치되고 있다.

▲ 경기도 파주 용미리 공동묘지에 무연고 묘지로 방치되어 있는 가수 이난영의 묘지
ⓒ 극단갯돌
이와 관련 목포문화연대(운영위원장 정태관)는 8일 "일제하에서 명성을 얻었고 목포를 전국에 알린 예술인의 묘가 잡초만 무성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하고 "목포시가 나서서 이장계획과 추모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기도 파주 묘지 무연고 방치

▲ 생전의 이난영 모습
ⓒ 정거배
이어 "이난영의 추모사업은 단순한 묘지 이장이라기 보다 목포가 문화예술의 고장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작업이며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지역출신 예술인의 기념사업"이라고 밝혔다. 또 "이난영 추모사업은 지역 문화예술인뿐만 아니라 각계각층과 지역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시민운동차원에서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였다.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출생한 그녀는 10살 무렵부터 오빠가 다니는 솜공장에 나가 여공으로 일을 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고단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15세 때인 목포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모친이 일하고 있는 제주도로 건너가 살게 된다.

당시 제주도에는 '태양극장'이라는 공연장이 있었는데,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 이난영은 극장주인의 소개로 막장가수(영화 시작 전에 노래를 부르는 가수) 활동을 시작한다.

16살이었던 이난영은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 돼 일본 공연을 갔다가 그곳에서 OK레코드 사장인 이철 사장의 주선으로 1933년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데뷔곡은 '향수' '불사조'였으며, 이때부터 가수 이난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데뷔 이듬해인 1934년 동요작가 윤석중의 가사를 딴 '봄맞이'에 이어 1935년 8월 그녀의 대표곡 손목인 작곡의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자 인기가 상승하면서 가수 고복수와 함께 OK레코드의 간판스타가 됐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녀의 출세작인 '목포의 눈물'은 당시 레코드사의 간판가수 고복수가 '갈매기의 항구'를 발표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그러다가 현상모집에 당선된 '목포의 노래' 가사를 붙일 마땅한 곡이 없어, '갈매기의 항구' 곡에 '목포의 노래' 가사를 입혔다고 전해진다.

이 노래를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로 바꿔 부르면서 대중가요계의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난영은 8·15 해방이 된 뒤 남편 김해송이 설립한 KPK악극단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6·25 동란으로 남편이 실종된 뒤로 미군부대를 대상으로 자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노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 왔다.

지난 65년 48세로 타계

그녀는 4남 3녀의 자녀가 있으며, 가수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이들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1965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한 현장에는 양주병이 놓여 있었다. 6·25 동란 당시, 남편과 이별한 이후 고독했던 자신의 삶을 술로 달래면서 눈을 감았다고 지인들은 전하고 있다. 이난영의 장례식은 연예인협회 주관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그녀가 타계한 지 1년 뒤인 1966년, 이난영을 기리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고향인 목포 유달산 중턱에 세워졌다. 유달산 탐방객들은 지금도 노래비 옆을 지나며 '사공의 뱃노래'로 시작하는 이난영의 구성진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기억하곤 한다.

이난영 추모사업을 제안한 목포문화연대 정태관 운영위원장에 따르면 "지난달 이난영 연극공연을 했던 극단 갯돌관계자가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이난영 차남 김영일씨를 만나 묘지 이장과 추모사업추진을 언급하자 적극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지난 2000년 추진하다 중단되기도

정태관 운영위원장은 "이난영 추모사업은 예향목포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시민다수가 동참할 수 있도록 추진위원회를 구성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00년 목포시의회 의장으로 있었던 최기동씨(현 김홍일 국회의원 보좌관)는 "당시 이난영 기념사업 추진을 위해 미국에 있는 자녀들로부터 위임장까지 받아 묘지 이장을 포함한 사업을 추진하다가 목포시의 비협조로 중단됐다"고 밝혔다.

최씨는 "'목포의 눈물' 노래 가사의 현장인 유달산이나 삼학도로 묘지를 이장하고 기념관을 시민 성금으로 건립하려고 했으나, 당시 시 당국이 공원지역에 분묘설치는 안 된다고 해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중에 건설교통부 등에 확인한 결과, 공원지역이어도 주민정서에 부합하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최씨는 밝혔다.

또 "가수 이난영을 기리는 국제가요페스티벌을 매년 개최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며 "목포 출신 국민가수였던 이난영 기념사업은 주민들의 애향심 고취와 관광자원 발굴 차원뿐만 아니라 우리 가요계의 근현대사를 보존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목포시는 목포문화연대의 이난영 기념사업 제안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입장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이다.

한편 지난 10월 개관한 경기도 가평 남이섬의 노래박물관에도 우리 가요사의 업적을 빛낸 인물 10명 가운데 이난영을 명예의 전당에 등록해 프로필 등을 소개하고 있다.
2004-12-09 17:33 ⓒ 2007 OhmyNews

 

1971년 최정자 목포의눈물

 

1990년 조갑경 목포의눈물

 

 

2012년 케이윌  목포의 눈물

 

김대중 대통령 내외께서 목포 시민들과 함께 불렀던 목포의눈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95회 5공 3S 정책(2005.05.22)

출처 : 부산촛불방송
글쓴이 : 부산촛불방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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