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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영극장! 60년 대 많은 추억과 애환과 아쉬움을 남겨두고 떠나간 네가 그립구나!

허 공 2018. 3. 30. 10:55

1964년 1월 24일!

날씨마저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을씨년스럽게 추웠다.

더욱이 낙동강 찬바람은 우리의 마음을 더 움츠러들게 했다.

 

동명중학교 최초로 극장 졸업식(동명중 17회)이 열린 수영 극장!

지금까지 졸업식은 우리가 1학년 때 공부하든 교실 3개를 개조하여 임시 강단으로 사용했다.

나는 이날 졸업생 답사를 하면서 주마등 같이 지나간  3년을 되새길 때 감정이 복받쳐,

서럽게 정말 서럽게 울다가 조희도 선생님의 달램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영 극장!

1963년 8월 15일 개관한 하남 상남 초동 무안 대산면민을 위한 현대씩 극장이 아니던가?

너의 개봉작이며 처음으로 우리 학교에서 소위 단체 관람한 영화는 <영친왕>이었다.

감성이 예민한 우리들은 그 영화를 보고 제법 눈물께나 짜아 내기도 했다.

<대전 발 0시 50분> 영화 때문에 교장선생님께 벌을 받은 사연도 수영 극장 너 때문이야.

 

<추풍령><동백아가씨>를 본 것도 바로 이곳으로 이전에는 각 동네마다,

가끔 방앗간이나 넓은 공터에서 가마니 깔고 앉아보거나 서서보는 소위 가설극장이었다.

그러다가 푹신한 의자에 잘 정리된 조명 오디오 시스템 끈기지 않은 깨끗한 화면!

 

극장이 생기므로 인근 주민들의 정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이 시기다.

어르신들은 5일장 때면 친구도 사돈도 친척들을 자주 만나지만 어디 젊은이야~~

그러다 극장이 생기므로 낮에 가사 들일 하고 밤에는 극장의 아늑한 장소를 제공한 것도 너야~~

 

 동창도 친구도 연인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풍속도가 만들어진 것도 수영 극장 때문이야.

더러는 극장 간답시고 달 밝은 밤 낙동강 모래사장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족도 생겼으며,

지금 육칠십 대 부부 중 근동 혼사가 많은 것도 아마 수영 극장 너의 영향이지 않나 싶다.

 

이 또한 세월의 흐름 대문일까?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며 인구는  도회지로 가고 그나마 남은 집들은 집집마다텔레비전이 들어오다 보니,

이제 시골극장은 많은 애환과 추억을 남기고 그렇게 뒤안길로 사라져 갔구나~~

 

혹시 고향에라도 갈 때는 옛 수산교를 거칠 때 ,

우측에는 모교 좌측으로 쉬고 있는 너를 볼 수 있었건만 그마저도 ,

지금은 신 수산교 또는 대구 부산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보니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아쉽다.

 

수영 극장아!

육십 년 대 우리에게 많은 추억과 애환과 아쉬움을 남겨두고 떠나간 네가 그립구나!

또다시 불러보마~수영 극장아!~긴긴밤 못 잊어 몸부림 처도 너는 다시 오지 않구나! 

 

주)

<대전 발 0시 50분> 영화 때문에 교장선생님께 벌을 받은 사연은,

다음에 <매 맞는 우리도 울고 때리는 선생님도 울다> 라로 올릴게요

 

수영 극장 개봉작 영친왕(1897~1970)

고종 광무 태황제(1852~1919)와 순헌황귀비 영월 엄 씨(1854~1911) 사이에 1897년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은입니다.
위로 황태자 척(순종. 1874~1926)과 장귀인 소생의 의친왕(1877~1955)을 형으로 두었습니다.

영친왕의 생모 엄 황귀비는 본래 명성황후를 모시던 상궁 출신으로 명성황후 생전에 고종의 승은을 받았다가

황후에게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1895년 을미 지변(을미사변이라고도 함)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고종에 의해 재 입궁해

고종을 모시게 되는데, 얼마 후 고종이 아관으로 파천(아관파천. 1896)할 때도 곁에 있게 됩니다.

영친왕은 바로 이 아관에서 고종을 모실 때 생긴 아들입니다. 영친왕을 낳고

귀인에서 순빈 다시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영친왕이 황태자에 책봉되자 황귀비가 되었습니다.

 

영친왕은 1900년 영친왕에 책봉되었고,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됨과 동시에

그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살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됩니다.

이때 고종과 엄 황귀비는 황태자가 방학 때마다 본국을 방문할 것을 조건으로 유학을 허락하지만,

영친왕은 이후 엄 황귀비가 사망하는 1911년까지 귀국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1910년 일본과 대한제국이 강제 합병되면서 왕세자 이은으로 강등되었고,

1926년 의붓형 순종이 사망하자 조선 이왕으로 불리게 됩니다.

 

고종은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립 되기 전에 민갑완(1897~1967)이란 소녀를 영친왕의 반려로 내정하여

이미 약혼예물까지 교환하였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왕세자의 부인을 일본 여인으로 앉히려

그 약혼을 강제로 파기하고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 궁 수정 왕의 맏딸

마사코(이방자. 1901~1989)를 영친왕의 약혼녀로 공개합니다(1916). 고종은 이에 대단히 분개하며,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역정을 냈다고 합니다.

 

1919년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이 예정된 그해에 고종은 돌연 사망하게 되어

다음 해인 1920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그다음 해인 1921년 첫아들 진을 낳지만,

1922년 마사코비가 생전 처음 방문한 조선에서 아들 진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1931년 둘째 아들 구(1931~현재)를 낳습니다.

 

영친왕은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장에 까지 이르렀으며,

조선왕실의 재산과 일본 정부가 지급하는 연금으로 당시 일본 왕족 중에서는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하게 되면서 영친왕과 마사코비 모두에게

일본 왕족의 자격이 박탈되어 재산을 몰수당하였습니다.

영친왕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고 싶어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의 귀국을 거부하였고,

그렇게 고향만 그리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에 와서야 겨우 입국이 허락되지만,

그는 두 다리로 한국 땅을 밟지 못하고 병원 이동 침대에 눕혀져 겨우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7년 동안 투병 후 1970년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소생으로는 마사코비와의 사이에 낳은 둘째 아들 구 씨가 전부입니다

출처 : 허공의 휴유정사
글쓴이 : 허공 (虛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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