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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야구야] 프로야구 40년 선수들의 숨은애기

허 공 2022. 10. 25. 08:43

김은식입력 2022. 10. 25. 05:03

[김은식의 야구야] 프로와 대학의 스카우트 전쟁

 
▲ '고졸 연습생 홈런왕' 장종훈 3년 연속 홈런왕과 최초로 40홈런을 돌파한 홈런왕. 그는 어느새 '고졸의 희망'이 되어 있었고, 그 희망을 배신할 수 없어 대학 입학을 포기했다.
ⓒ 한화 이글스
"프로에서 성공하고 나서, 입학을 제안하는 대학들이 있었어요.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졸업할 수 있게 편의를 봐주겠다고까지 하면서. 가고 싶었죠. 고등학교 졸업할 때 가고 싶었지만 못 간 거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내가 본의 아니게 '고졸 신화'가 돼 있었잖아요. 대학에 못 가고 사회생활 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는 사람이 돼 있었던 거고. 그런데 제가 대학에 가버리면, 그걸 배신하는 게 되잖아요. 갈 수가 없었죠." - 장종훈, 필자와의 대화 중에서

세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빙그레 이글스의 연습생으로 입단한 뒤 1990년부터 3년 연속 홈런왕에 오르고 1992년에는 최초로 40홈런의 벽을 넘어선 장종훈에게 '홈런왕'이나 '거포'보다도 먼저 붙은 별명은 '고졸 연습생 신화'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프로선수 생활을 하는 경우는 그만큼 흔치 않았고, 성공하는 사례는 더욱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고교야구의 뛰어난 선수들 대부분이 프로팀 입단을 희망하며, 대학에 진학하는 선수들도 대부분 이를 악물고 '4년 뒤'를 벼른다. 대학야구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2019년부터는 모든 프로야구팀이 의무적으로 1명 이상의 대졸 선수를 지명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을 정도다.

유별나게 강한 한국의 학벌주의는 야구장에서 조금 먼저 깨지기 시작한 셈인데,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것 자체가 학벌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체 능력을 겨루는 스포츠에서마저 한동안 힘을 썼던 학벌주의란 지식과 전문성 이전에 인맥이 결정적인 요소였음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무대에서 '고졸'에 대한 인식이 정반대로 뒤집히는 과정은 여러 차례 이루어진 제도의 변화에 의해 자극되었으며, 제도의 변화는 또한 직접적인 것만은 아니라도 사회적인 변화가 투영되어 이루어졌다.
 
 
▲ '고졸 신화' 문희수 프로창설 이후 처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팀에 입단한 문희수는 1985년 12승을 기록했고 1988년에는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됐다.
ⓒ 기아 타이거즈
장종훈 이전에 '고졸신화'라고 불린 선수가 있었다. 1985년에 12승을 기록하고 1988년에는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된 문희수다. 그는 1984년 삼성의 정성룡, 롯데의 조용철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팀에 입단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2년차부터는 최강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며 '신화'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게 됐다. 

하지만 그가 '최초의 고졸 프로야구선수'는 아니었다. 창설 첫해인 1982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실업팀에서 뛰다가 입단한 선수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그 해 타격 10위권 타자 중에서도 백인천, 윤동균, 신경식, 김우열 등이 대학을 다니지 않은 선수들이었고 평균자책점 10위권 내의 투수 중에서도 하기룡과 이선희가 고졸이었다.

특히 팀의 필요에 따라 2루수와 3루수를 오가며 베어스를 우승으로 이끈 호타준족의 만능수비수 구천서는 불과 한 해 전인 1981년 실업야구 상업은행 소속으로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갓 스무 살의 어린 선수였다.
 
 
▲ 20세 프로선수 구천서 1982년 호타준족의 내야만능수비수로서 팀의 우승에 기여한 구천서는 20세였다. 한 해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팀 상업은행에서 뛰던 중 프로팀으로 이적한 경우였다.
ⓒ 두산 베어스
 
금융단 야구의 몰락과 대학야구의 성장

원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야구선수들에게 대학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대의 다른 많은 또래들처럼 집안에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대학에 갔고, 그렇지 못하면 실업팀으로 갔다.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야구가 평생의 직업이 될 수는 없었기에 먼 미래를 생각하면 대학에 가서 공부도 하고 인맥도 쌓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 특기를 살려 은행에 취직해 몇 년간 야구선수로 뛴 다음 일반 지점으로 발령을 받는다면, 정년을 보장받으면서 어지간한 대졸자 못지않은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 은행은 대기업보다 나은 직장이었고,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고교야구의 영향으로 야구팀을 만드는 대학들이 늘어났고, 1960년대 말까지 7개에 불과했던 대학야구팀은 1970년대에만 7개가 늘면서 두 배로 불어났다. 그리고 1974년에는 금융권의 악습을 일소하겠다고 나선 재무부의 '서정쇄신' 여파로 은행 직원들의 실질 연봉이 1년 만에 14% 떨어지고 근무 시간도 늘어나면서 은행 취업의 인기가 곤두박질 치는 일까지 겹쳤다.

당대 실업야구 최고의 선수였던 상업은행의 3년차 김일권이 뒤늦게 한양대학교 77학번으로 입학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 그때였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야구선수들에게 은행은 덜 매력적인 선택지로 바뀌었고, 대학 입학의 문은 더욱 넓게 열린 셈이다.
 
 
▲ 실업팀과 대학팀을 오간 대도 김일권 1970년대 후반 김일권은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였다. 국가대표팀 4번에 배치될 정도의 공격력과 각종 대회 도루왕을 휩쓰는 주력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실업팀 상업은행에 입단했지만 3년 뒤 한양대에 입학했고, 프로야구가 창설되자 다시 한양대를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 초대 도루왕에 올랐다.
ⓒ 기아 타이거즈
 
하지만 프로야구가 창설되면서 다시 한번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한다. 프로팀은 일단 일반 직장인 몇 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줄 수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실업팀에서 전망을 찾을 수 없다면 일찌감치 프로무대에서 승부를 걸어보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절대적인 선수 부족으로 허덕이던 팀들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혹은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는 선수들에게 손을 뻗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인하대에 재학 중이던 투수 김동철을 영입했고, 해태 타이거즈는 한양대생 이상윤과 영남대생 방수원을 빼냈다.

광주상고 포수 장채근과 진흥고 투수 김정수가 대학에 진학하라는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프로선수가 되겠다'며 가출을 감행했다가 아버지에게 붙들려 대학팀 숙소에 넘겨질 만큼 크게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프로야구의 창설과 대학야구의 위기

문희수의 등장은 그런 배경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가 던진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그의 뒤를 따라 대학 대신 프로를 선택하는 사례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 분명해 보였고, 대학팀들의 위기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대학팀 관계자들의 우려는 야구협회를 거쳐 한국야구위원회로 전달되었고, 굳이 아마추어야구와의 관계를 상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하던 프로팀들은 1984년 11월 14일에 열린 이사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신인 선수는 뽑지 말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1987년부터 연고지 선수들에 대한 지명권이 3장으로 제한되고 1991년부터는 1장씩으로 줄이기로 하면서 프로팀들의 입장은 돌변한다. 지명권이 무제한일 경우에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라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었지만, 이젠 가능성이 있는 선수라면 2차 지명으로 미리 입단시키거나 정말 뛰어난 선수라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점에 1차 지명권을 행사해서라도 최소한 확보를 해둘 필요가 대두되었다. 2차 지명권의 효력은 1년이었지만 1차 지명권의 효력은 영구적으로 보장됐기 때문이다.

1989년에 7개 프로야구단은 아직은 무제한으로 주어지던 2차 지명권을 활용해 모두 44명의 고졸 신인들을 입단시켰고, 그 수는 1990년 96명, 1991년 88명으로 늘어났다. 해마다 100명 가까운 뛰어난 선수들을 프로팀에 빼앗긴다는 것은 대학팀에게는 재앙이었다. 1990년대 중반 20개까지 늘어난 대학 팀들이 평균적으로 5명 안팎의 우수한 선수들을 잃는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프로팀들은 욕심껏 선발했던 선수들을 모두 정성껏 육성한 것도 아니었는데, 예컨대 1991년에 입단한 88명의 고졸 신인 중 무려 62명이 1년 안에 방출되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 5년은 프로팀과 대학팀의 전쟁이 벌어진 시기였다고 표현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선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면 프로팀과 대학팀의 직원들이 각각 계약서와 입학지원서를 들고 가족과 학교와 친구들까지 엮이는 온갖 회유와 압박을 동원한 서명받기 경쟁을 벌였다.

일단 한 쪽이 서명을 받는 데 성공한 다음에는 선수를 납치해서라도 마음을 돌리려는 쪽과 선수를 지키기 위해 숨겨두려는 쪽이 또다시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활극을 벌이곤 했다.

1990년대, 프로와 대학의 전쟁

그래서 1990년대 초중반 고교야구에서 나름대로 이름 있는 선수였다면, 프로팀 입단계약서에 서명한 다음 계열사 호텔의 밀실에 감금되었다가 대학의 입학지원서 접수마감일이 지난 뒤에야 풀려나거나, 반대로 입학지원서에 서명한 뒤 대학팀 선배 선수들 몇 명의 호위와 감시를 받으며 가족들과의 연락마저 끊긴 채 어느 외딴섬에 있는 교직원의 고향집에 갇혔던 경험 정도는 가지고 있다.

1990년에는 대학과 프로팀 사이에 대대적인 법정 싸움이 벌어졌다. 빙그레 이글스와 연세대 사이에서 고민하던 대전고 투수 안희봉과 태평양 돌핀스와 인하대 사이에서 갈등하던 동산고 투수 위재영이 각각 이중계약의 파문에 휘말린 것이다.

'이중계약' 소송은 2년 뒤인 1992년에도 되풀이되었는데, 신일고의 천재 타자 강혁을 차지하기 위한 한양대와 OB 베어스의 싸움은 극단까지 치달으면서 결국 강혁에게 'KBO 영구실격'이라는 치명적인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공주고를 졸업한 노장진이 원광대 동계훈련 중에 숙소를 뛰쳐나와 빙그레와 입단계약을 하며 역시 소송에 휘말린 일도 있었다.

그 와중에 고졸 신인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지며 스카우트 전쟁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역대 가장 많은 대형 유망주들이 쏟아져나온 1992년에는 프로야구 신인지명전에서 8개 구단 중 무려 3개 구단이 단 1장뿐인 1차 지명권을 고등학교 졸업자에게 행사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LG가 휘문고 투수 임선동, OB가 경기고 투수 손경수, 해태가 광주일고 투수 박재홍이 대학을 졸업한 뒤에라도 다른 팀에 갈 수 없게끔 '찜'을 해놓기 위해 대졸 선수 한 명씩을 입단시킬 기회를 포기한 것이다. 여전히 선수들이 대학 입학에 조금 더 기울어있던 당시로서 선수들을 대학에 뺏길망정 다른 팀에는 뺏길 수 없다는 절박감의 표출이었다.

프로와 대학이 벌인 스카우트 전쟁의 절정은 역시 1994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졸 투수 염종석과 정민철이 대학을 졸업한 거물 신인 정민태를 압도하며 충격을 던진 1992년 시즌을 지나며 프로팀들은 고졸 신인들을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닌 '즉시전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제시하는 계약금 규모 역시 껑충 뛰어올랐고, 1992년 못지않은 대형 신인들이 1994년에 다시 한 번 쏟아져나왔다.

그 해 고교 최고 타자의 명성을 다투던 신일고 김재현과 배명고 김동주를 잡기 위해 각각 연세대와 LG, 고려대와 OB가 격돌했다. 한일고교정기전이 열리던 오키나와 숙소로 잠입해 연세대 입학이 결정되어있던 김재현에게 같은 해 입단하는 국가대표 주전 내야수 출신의 대졸신인 류지현보다도 많은 1억의 계약금과 팀의 상징적 등번호인 7번을 얹어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 입단계약서에 서명을 받아낸 LG가 한쪽의 승자였다.

김동주에게 가족이 머물 집과 매달 생활비를 제공하기로 하며 1억 5000만 원의 계약금을 제시한 OB를 따돌린 고려대가 다른 한쪽의 승자였다. 같은 해 롯데는 부산고 주형광을, LG는 충암고 신윤호를, 해태는 광주일고 이호준을 각각 대졸신인과 큰 차이가 없는 1억 안팎의 계약금으로 붙잡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5년에는 부모님 뜻에 따라 한양대 입학지원서에 서명했지만 내심 프로에 가고 싶었던 경북고 이승엽과 경남상고 김건덕이 동시에 수능시험을 고의로 망쳐 체육특기자 커트라인 아래의 점수를 받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한 사람은 프로팀으로, 다른 한 사람은 한양대로 진로와 운명이 갈리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96년에는 역시 고려대 진학이 결정되어있던 인천고의 천재 유격수 박진만 역시 현대 유니콘스 스카우트에게 납치되어 접한 파격적인 제안에 마음을 돌리고 '수능 망치기' 전술로 이중계약 소송의 위기를 벗어나 프로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승리한 프로야구, 고졸 선수가 대세를 이루다
 
 
▲  지난 9월 15일 오후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2023 KBO 신인드래프트. 지명된 선수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 수년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대세는 대학에서 프로로 이동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대학이 약간 우세한 입장이었다. 부모와 선수가 모두 대학 진학을 선호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대학은 프로팀과 달리 '동료 여러 명을 함께 입학시켜주는' 당근과 '제안을 외면할 경우 앞으로 몇 년간 후배 선수들을 입학시키지 않기로 하는' 채찍을 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팀이 월등한 수준의 계약금을 주 무기로 삼았지만, 대학도 얼마간의 장학금과 '함께 입학시키는 동료 선수들의 성금'을 모아 마련하는 약간의 보조금으로 격차를 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부모는 여전히 대학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선수들은 '얻어맞으면서 4년간 고생하느니, 일찍 자유를 누리며 돈을 벌자'고 생각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변화는 경제적인 영역과 문화적인 영역에서 동시에 비롯되었다. 1990년대 들어 풍요로워진 경제 상황과 유연해진 사회문화적 흐름 속에 성장한 선수들은 여전히 체벌이 난무하며 군기를 강요하는 대학야구팀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반면 고졸 출신 선배들의 대활약과 현대의 실업팀 피닉스의 창단에 맞서기 위해 급격히 불어난 프로팀의 물량 공세는 다른 방식의 선택을 이끌었던 것이다.

바뀐 상황은 제도의 변화를 이끌었다. 우수한 고졸 선수들이 대학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프로팀으로 직행하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연고지역 내 고졸 선수들을 무제한으로 영입할 수 있었던 기존의 방식 역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996년부터 1999년까지는 '고졸우선지명제도'라는 과도기적 제도가 도입돼 각 구단이 1차 지명에서 대졸과 고졸 선수들을 따로 지명하도록 했고, 2000년 이후로는 신인지명에 있어서 고졸과 대졸 선수들에 대한 제도적 차이가 사라지게 되었다.

야구장에서 벌어진 프로와의 스카우트 전쟁에서 대학이 패배한 이유는, 대학의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선수들의 최종 목적지가 프로팀인 한에서, 그 프로팀과 경쟁해서 이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곱씹어볼 것은 '대학이 진 이유'가 아니라 '한때나마 대학이 프로에 맞설 수 있었던 이유'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가져온 부풀려진 위상과 뒤틀린 기능이다. 배움도, 성찰도, 수련도 의미 있는 대학의 역할이지만 그것 자체가 권위가 되고 자격이 되고 특권이 되는 시대가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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