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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자란 고향 고을 대사동

허 공 2018. 3. 25. 21:05

                            풍류현에서  바라  본  대사리  전경                                           

                                                                                                                                                                                                                     

 뒤로는 남전현(南田峴)의 능선이 병풍을 두른 듯 포근히 감싸고 있다. 동쪽으로는 분상산(墳上山)의 능선이 남으로 뻗어 내려와 풍류현(風流峴)까지 이른다. 서쪽으로는 귀명동의 동편 청룡등(靑龍嶝)의 능선이 남으로 나즈막하게 뻗어 내려와 서당골, 소바우까지 이른다. 분상산(墳上山) 아래쪽에 대사동(大司洞)이 있고, 그 남쪽에 창동(倉洞)이 있다. 임춘산(臨春山) 아래쪽에 덕동(德洞)이 있다. 남쪽으로 틔여 있으며, 넓은 하남평야(下南平野)가 펼쳐져 있다. 마을 앞으로 밀양에서 수산으로 가는 25번 국도(國道)가 통과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의대곡(義大谷)[이대곡(二大谷)], 창동(倉洞)과 합쳐 대사리(大司里)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지금은 대사동(大司洞), 창동(倉洞), 덕동(德洞) 등 3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정리동명은 대사리이다. 이 마을 중간 지점에 일제 초기에 건립된 대사국민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한 때 하남읍의 교육 중심지 역할도 했다. 동으로는 파서리, 서로는 양동리, 남으로는 백산리, 북으로 남전리와 각각 인접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양무공박연김공신도비(襄武公博淵金公神道碑)가 있다. 

 

(1) 대사동(大司洞, 谷良洞里, 한제골, 大寺洞)

 대사리의 본동이다. 옛 이름은 곡량동리(谷良洞里)였다. 뒤에는 한제골, 부남이동사동리(府南二洞寺洞里), 대사동리(大司洞里), 대사리(大司里) 등으로 불려졌다. 대사동(大寺洞)이라고 한 것은 마을 뒤 절터골에는 옛날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다. 후에 절이 망한 뒤 동명(洞名)을 '사(寺)' 자 대신에 '사(司)'로 고쳤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일찌기 박씨(朴氏)와 윤씨(尹氏)들이 살았다고 전하나, 그 사적이 분명치 않다. 임진왜란 후에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가 이 마을에 이거(移居)한 후 지금까지 광주김씨(廣州金氏) 일족들이 세거해 오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대학당(大學堂)과 양무공불천위별묘(襄武公不遷衛別廟)가 보존되고 있다. 대학당(大學堂)은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가 선조대왕(宣祖大王)으로 부터 하사받은 대학(大學) 1부와 교지(敎旨), 유서(諭書), 공신녹권(功臣錄卷) 및 유기(遺記) 등을 영구 보존하기 위하여 1662년에 창건하고, 후손들의 강학소(講學所)로 사용되어 오다가 후대에 다시 중건되었다. 

 

○ 동녘골(洞里谷)

 대사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동네산(洞山) 밑에 있다.

 

○ 동산(洞山)

 대사동 동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은 마을의 공유지이다. 그래서 붙은 지명이다.

 

○ 못뚱칭이(안산밑둘)

 대사동과 덕동 사이에 있는 들로써 안산 밑에 있다. 옛날에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지명이다. 지금은 못이 없어지고, 논이 되었다. 또 안산 밑에 있다고 하여 안산밑들이라고 한다.

 

○ 밤밭등

 안산 밑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은 옛날에 밤밭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 분산(墳山)

 대사리 동쪽 동녘골 위에 있는 산이다. 이곳에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 장군(將軍)의 묘소(墓所)가 있다. 원래는 이 산 중턱에 묘소(墓所) 자리를 잡았는데, 장례시에 상여를 메고 가는 상두군이 목적지까지 가는데, 이곳에 와서는 발이 붙어 오도가도 못해서 그 자리에 묘소(墓所)를 드렸다고 한다.

 

○ 절터골(寺谷, 절뒷골)

 대사동 뒤에 있는 산골짜기이다. 분산(墳山) 옆에 있다. 이 절의 이름과 창건 연대, 폐사 연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빈데 때문에 망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 부근의 돌에는 빈데껍데기가 보인다고 한다.

 

○ 바랑골

 절터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으로 중이 바랑을 지고 왕래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은 상남면 조음리로 가는 고개가 있다.

 

○ 큰갓골

 바랑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은 골짜기가 크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 구동산(舊洞山)

 큰갓골 옆에 있는 산으로써 옛날에는 마을의 공유지였다. 일제 때 개인의 소유로 바뀌었다. 그래서 구동산(舊洞山)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산등(山嶝)이 6개가 있다. 첫째 등이 공동묘지산이다.

 

○ 순산등(順山嶝)

 큰갓골 옆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산등성이가 순하게 내려 왔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 부처바우등

 동산 정상부에 있다. 이곳에 부처바우가 있는데, 바위의 모양이 마치 부처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해롭다고 하여 조림(造林)을 해서 바위가 안보이도록 해야 한다고 전한다.

 

○ 서당갓(書堂山)

 동녘골과 동산 사이에 있는 산이다. 옛날 서당(大學堂)에 필요한 땔감을 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 안산등(案山嶝)

 구동산(舊洞山)에서 밤밭등으로 내려오는 큰 산등성이이다. 마을 앞에 보이는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쇠끝산(세끝산, 石鏡山)

 창동의 동쪽 맞은편 끝 부분에 있는 산이다. 일제 때 철광(鐵鑛)을 채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지명이다.

 

○ 풍루고개(風流峴,풍두고개)

 대사리에서 파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밀주지(密州誌)에는 신라왕(新羅王)이 이궁(離宮)하면서 이곳에서 봉선(封禪)을 올리고 풍악(風樂)을 울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 정남정(定南亭)이 있었는데, 남방(南方)의 금관가야를 병합한 기념으로 세웠다고 전한다. 

 

(2) 덕동(德洞, 二大谷, 義大谷)

 대사동의 서쪽 임춘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 이름은 이대곡(二大谷)이다. 이대곡(二大谷)이라고 한 것은 이 마을 뒤산에 있는 골짜기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혹은 의대곡(義大谷)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덕동(德洞)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도 광주김씨(廣州金氏) 일파의 세거지(世居地)였다.

 

한말(韓末) 고종(高宗) 연간에 밀성박씨(密城朴氏) 일파가 이거(移居)하여 지금까지 세거해오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구옹(矩翁) 김태을(金太乙)의 유적을 추모하기 위한 임춘재(臨春齋)와 동호(東湖) 김지일(金之鎰)을 추모하기 위한 동호재(東湖齋)가 보존되고 있다. 또 이조정낭(吏曹正郎) 박정남(朴正南)의 묘하재숙소(墓下齋宿所)로 건립된 원모재(遠慕齋)도 함 보존되고 있다. 

 

○ 임춘산(臨春山)

 덕동의 뒷산이다. 남향이어서 꽃이 먼저 피고, 봄이 먼저 온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 배나무골

 구동산과 임춘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는 옛날에 배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에 남전고개가 있다.

 

○ 씨름고개

 덕동에서 귀명리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이곳에서 장정들이 모여 씨름을 하였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양동고개(良洞峴)

 덕동에서 양동리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 임춘골(臨春谷)

 임춘산과 대사동 안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조개바우등

 덕동과 귀명동 사이에 있는 산 중턱에 있다. 이곳에 조개를 닮은 큰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옛날 덕동은 해마다 홍수(洪水)가 일어나서 마을 사람들은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떠나는 바람에 호수(戶數)가 절반 이하로 줄어 들었다. 이러한 일 때문에 마을 촌장은 매일 걱정을 하며 어떤 대책을 세우고자 했으나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날도 촌장(村長)은 홍수를 막고 마을을 다시 일으킬 생각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 조개바위를 가리키면서 바위 중간을 둟어 보라고 하고 사라졌다. 깜짝 놀라 잠을 깬 촌장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큰 바위로 올라가 바위 중간을 뚫었는데, 그 안에서 갑자기 많은 조개가 쏟아져 나와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그 해부터 홍수도 일어나지 않고 마을이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조개가 나왔던 바위라고 해서 "조개바위"라고 불렀고, 산 이름도 "조마두"라고 했다고 전한다.

 

○ 뒷갓등

 덕동 뒤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은 임춘산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뒤에 있는 갓등이라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 배암동골

 뒷갓등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의 지세(地勢)가 뱀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3) 창동(倉洞)

 대사동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 양동역(良洞驛) 역전(驛田)의 세(稅)를 받아 보관하던 창고(倉庫)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도 마을 내에는 '창집터'가 남아 있다. 이 마을도 광주김씨(廣州金氏)의 세거지였다. 지금은 여러 성씨가 들어와 함께 살고 있다.

 

○ 창집터

 창동 남쪽에 있다. 옛날에 양동역의 역답(驛畓)의 세(稅)를 받아 보관하던 창고(倉庫)가 있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출처 : 허공의 휴유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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