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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제국 패배의 시작 "할힌골 전투 (일본명:노몬한 사건)

허 공 2018. 4. 1. 10:13

자료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D%95%A0%ED%9E%8C%EA%B3%A8_%EC%A0%84%ED%88%AC

 

https://mirror.enha.kr/wiki/%ED%95%A0%ED%9E%8C%EA%B3%A8%20%EC%A0%84%ED%88%AC

 

 

 

 

 

 

할힌골 전투(몽골어: Халхын голын байлдаан, 러시아어: бои на реке Халхин-Гол, 일본어: ノモンハン事件 노몬한 지켄[*], 영어: Battles of Khalkhin Gol, 한국에서는 일본의 영향으로 노몬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는 1939년 5월부터 8월까지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 지대인 할힌골 강 유역에서 소련군과 몽골군과 일본 제국의 관동군, 만주국군의 전투를 말한다.

 

당시 만주는 일본 관동군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노몬한 부근은 국경선이 확실치 않아 잦은 분쟁이 일어났다. 1939년 5월 11일 몽골군 기병 70-90명이 할힌골 강(江)을 건너오자 일본군은 이를 불법월경(不法越境)으로 간주하여 할힌골 전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참패하여 소련이 요구하는 대로 할힌골 강을 경계로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또한 양국은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이 소련의 극동을 공격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끝까지 소련과 맺은 조약을 지킨 것도 바로 이 전투의 패배의 영향이 컸다.

 

 

소련군 BA-10 장갑차

 

제1차 할힌골 전투

전투 초반-소련의 근소한 우세

 

중·일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로 일본의 대본영(大本營)에서는 사건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관동군은 이를 무시하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 공세를 취했다. 몽골과 상호 원조 조약을 맺고 있었던 소련군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5월 28일 니콜라이 블리디미로비치 페클렌코(러시아어: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Фекленко)가 이끈 소련군 1,500여 명은 숫적으로 우세한 2,000여 명 이상의 관동군과 맞서 싸웠다. 병력 면에서 소련군은 열세였으나, 장갑차와 야포,자주포의 숫자와 성능은 소련군이 우세하였다.소련군은 야포와 자주포, 장갑차를 적절히 활용하여 일본군의 대응 전력을 먼저 격파한 다음 보병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일본군은 약 50-70%의 피해를 보아 전멸했으나 지상전과는 달리 공중전에서는 일본군이 우세했다. 이는 제 2차 할힌골 전투의 불씨가 되었다.

제1차 할힌골 전투를 승리로 이끈 페클렌코는 모스크바에서 훈장을 받았다. 몇몇 문헌에서는 페클렌코가 숙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하산 호 전투의 사령관인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와 혼동한 오류에 지나지 않다. 페클렌코의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주코프였다.

 

 

소련군 전차

 

제2차 할힌골 전투

전투 중반-소련의 우세

6월 27일, 일본 관동군 항공대는 107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톰스크 일대의 소련의 항공기지를 급습하였다. 톰스크 공군 기지의 절반이 파괴되었고 소련은 1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상실했다.
이와 같은 급습을 당한 소련은 보복전을 준비하였다. 당시 소련의 외무인민위원이었던 몰로토프는 앞으로 전개될 보복전이 단순히 톰스크 기지의 피해를 앙갚은 하는 것을 넘어 만주와 몽고의 국경을 정함에 있어서 소련의 우위를 점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한다고 역설을 하였다. 몰로토프의 주장에 대해서 스탈린은 옳다고 생각하여 벨라루스 관할군 부사령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를 할힌골 전투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맞서 관동군 내에서도 정예라 불리는 제 7사단을 투입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쌍방의 병력 상황

주코프 장군은 모스크바에 대규모의 지원 병력을 요청했다. 모스크바는 이에 화답하여, 주코프의 요청의 2배가 넘는 병력을 주코프에게 보내주었다. 그 결과, 주코프 장군의 소련군은 3개 소총사단, 2개 전차사단, 2개 전차여단, 2개 차량화보병사단, 전투기와 폭격기 557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전차는 498대에 이르렀다. 주코프는 이 물자들을 눈에 띄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전장까지 이동시켰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전차 135대와 항공기 250대를 보유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의 전차보다 성능이 뛰어난 전차를 많이 보유하였다. 일본군의 주력 전차는 89식 중전차나 97식 전차로, 대부분 소련군 전차와 기갑전을 벌이기에 부족하였다 . 소련군 전차는 BT-5, T-26 등이 있었다. 전투에 임하여 일본군 기갑병력은 열세를 드러 내어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는데 급급하였다. 일본군 포병도 소련군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과 기세에 눌렸다. 일본군에게 점차적으로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할힌골 강 서안에서 일본군의 반격에 맞서 싸우고 있는 몽골군

 

 

전투 후반-주코프의 반격, 소련의 압도적 승리

7월 2-3일에 80대의 전차와 100문이 넘는 대포로 일본군 10,000여 명이 공격해 왔으나 446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장비하고 있던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일본군은 악착같이 맞서 싸우기는 했으나 결국 수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4-5일에 걸쳐 일방적으로 패주했다. 일본군 전사자들 갸운데는 익사자도 적지 않았다. 소련군도 수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할힌골 강을 도하 중인 소련군 전차

일본군의 공세가 소진되기를 기다린 주코프는 현대화된 기갑 전력을 이용하여 8월 20일 대규모의 포병력과 차량화 보병을 이용한 화력지원을 하고 폭격기와 전투기를 동원한 공중지원과 함께 기갑전력(3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과 보병을 포함한 50,000여 명의 대병력으로 하여금 강을 도하하게 하는 대담한 기동 작전을 감행했다.


 

 할힌골에서 소련 극동군 참모장 그리고리 슈테른(왼쪽), 몽골 대통령 허를러깅 처이발상(가운데)과 함께 작전계획을 짜는 주코프(오른쪽).

 

 


할힌골 전투의 소련군 계획도


또한 500여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20일 새벽 5시 45분부터 일본군 진지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대규모의 포격도 일본군 진지를 향해 가해졌다. 2만 수천여 명의 잔존 일본군은 강력히 저항하면서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5], 소련-몽골군의 500여 전차와 50,000여 병(3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은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군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일본군 제 23사단은 8월 25일에 이르러 소련군의 넓은 포위망 안에 갇혀버렸다.

8월 26일에 일본군은 제 23사단을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하였다. 그 다음날인 27일에는 제 23사단이 포위망을 돌파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였다. 일본군이 항복에 머뭇거리는 사이, 소련의 포격과 항공 폭격이 일본군 진영에 계속인 타격을 가하였다. 31일에 이르자, 일본군은 사실상 붕괴하였다. 제 23사단의 잔여병력은 만주국 국경으로 겨우겨우 빠져나갔다. 관동군은 투입된 병력의 절반을 손실하였다. 전투가 벌어졌던 할힌골은 드넓고 황량한 평야 지대였기에, 기계화되고 근대화된 소련군이 역량을 펼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다.(일본의 '총검 백병주의'도 이 때 무참히 깨졌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


관동군 6군 전체가 소련군 포위망에 갇혀버렸는데, 특히, 관동군 6군 제 23사단은 피해율이 70%-80%에 달할 정도였다.제 23사단의 대부분이, 전투가 벌어지기 불과 1년 전에 만들어진 사단이었고, 병력의 거의 대부분이 신참 징집병이며, 물자도 다른 보병사단보다 형편이 없었다.


 

 

 

 

 

 

 


2주 만에 관동군은 할힌골 전장에서 처참하게 전멸당한채 후퇴했다.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항상 승승장구 하였던 일본 육군은 최초의 대참패를 맛보았다

 

 

전투 이후
이 전투에서 근대화된 소련군의 기갑 전력에 “총검 백병주의”를 앞세우던 관동군은 참패하여 소련이 요구하는 대로 할힌골 강을 경계로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 전투 이후 그 동안 계속되었던 소련-일본 국경 분쟁은, 이로써 결국 끝을 맺었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전투가 끝난 직후인 9월 1일에 개시되었던 탓에 동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소련은 9월 17일 폴란드 동부 국경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소련군에 노획된 일본군 포


일본군은 물량과 기갑 전력 면에서 앞선 소련군을 당해내지 못하였고(이미 1938년에도 소련의 전설적인 명장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에게 하산 호 전투에서 일본군은 압도적인 병력 차와 기갑 전력의 차이로 패배한 적이 있었다. 단, 이 전투에서는 소련군의 피해도 심했던 까닭에, 후에 블류헤르 원수의 숙청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여러 차례의 국경 분쟁은 모두 소련 측이 원하는 대로 일단락되었다.

 


또한 양국은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이 소련의 극동을 공격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끝까지 소련과 맺은 조약을 지킨 것도 바로 이 전투의 패배의 영향이 컸다. 할힌골 전투에서의 승리가, 독일과 일본이 손을 잡아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저지한 것이었다.

 


사령관들의 운명
이 전투의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관동군 사령관과 참모장와 일선 지휘관인 고마쓰바라 미치타로는 전역되었다. 이들과는 전혀 다른 전후 상황을 맞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게오르기 주코프였다. 그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서 그 공적을 치하받았고, 덧붙여서 소련 영웅 칭호까지 수여받았다. 세간에 고마쓰바라 미치타로가 주변의 강한 압력을 받아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위암 수술 도중에 사망하였다. 물론 그가 참패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게 되어 주변으로부터 강하게 자살 압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일개 참모 주제에 독단적으로 사령관 서명란에 대리 서명하여, 월권으로 전투를 확대시킨 장본인 쓰지 마사노부 역시 일시적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지는 것이다”라는 정신승리를 구사하던 쓰지는 열심히 싸운 일선 연대장들에게 할복자살을 강요하고, 자신은 태평양 전역으로 전출되어 과달카날 전투에서 또다시 독단으로 지휘체계를 교란, 파멸적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쌍방의 피해에 관한 논의와 논란
참고로 이 전투는 소련이 대승했지만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밝혀진 소련 문서에 따르면 소련의 피해도 결코 적지 않은 전투였다. 사상자 관련 수치에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일본 측의 전사자는 45,000여 명, 소련 측의 사상자는 17,000여 명에 달한다.또한, 다른 자료에는 일본 측의 사상자는 17,000여 명, 소련 측의 사상자는 9,000여 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부는 일본군 전사자가 50,000여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투 당시 일본과 소련은 모두 개인과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전체주의 국가였기에, 정확한 수치를 제대로 발표하지 않아서 수치 정확한 전사자들의 수를 알기가 어렵다. 일본 관동군이 거의 괴멸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서방 연합국들의 수치가 가장 믿을 만 하다고 판단된다.

 


특히 일본 육군 항공대의 공습과 화염병 투척으로 인한 피해가 상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주코프 장군도 이 전투가 첫 실전이었던 까닭에, 그리 세련되거나 매끄럽지 못한 전투 진행을 보여주었고, 또한 여러 번 실수를 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의 정치적 압박과 더불어 주코프 개인의 공명심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코프는 총검과 화염병으로 처절히 맞서 싸운 일본군 장병들의 용맹을 칭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게오르기 주코프는 현대적 기동전과 종심 교리를 잘 익힌 지휘관이었다. 전투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소련군도 병력과 기갑 전력을 대량으로 투입하고, 또한 에스파냐 내전으로 다져진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와 전투기들도 투입하면서 일본군은 제공권마저 빼앗겼고, 결국 할힌골에서 참패하였다.

 

 

 -이모저모-

 


할힌골의 Ki-27(97식 육군 공격기). 보이듯이 랜딩 기어가 고정식이다.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의 전투기들은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을 상대로 대등한 전과를 올리긴 했고, 우세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물론 양측 모두 자신들이 우세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측은 10:1 에 가까운 우세한 격추비를 보였다고 발표했고, 이를 그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일본측이 우세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이를 근거로 일본의 전투기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분쟁 초반기의 이야기다. 그리고 초반기의 소련군 전투기의 대부분은 구식 복엽기였다.

 


 


할힌골 초반에 투입된 소련 공군 제70비행연대 도장의 I-153 .

 I-15도 기체 모양이 거의 같다.

 

이렇게 복엽기가 일본군에게 고전하자, 이후 투입된 소련군의 전투기는 단엽기 I-16인데, 이 전투기만으로도 소련군은 일본군을 압도했다. 이 전투기조차도 당시에는 시대에 뒤진 전투기였고, 2년 후, 독소전쟁에서 초반에는 독일군의 Bf-109에게 처참한 격추비를 기록했다. 그러므로 일본 육군 항공대의 전과는 일본이 선전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봐도 이 전투 후반기에 이르러서 일본측이 주장하는대로 일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소련군이 아무리 우세한 기갑부대를 동원했었던들 일본군이 거의 탈출을 못하고 전멸했을리가 없다.

 

즉 소련군이 당시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작전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소련측의 전투기 손실은 오히려 일본측에서 발표한 일본측의 전투기 손실보다 적었다.

 


I-16은 당시에도 최신형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종이었지만, 독-소 전쟁 초반에 각인된 것처럼 아주 나쁜 전투기는 아니었다. 이는 전투기 성능보다는 2년간 실전경험을 쌓은 독일 공군이 그 당시에 소련군을 압도하는 숙련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인입식 랜딩기어를 장착한 기종이기도 하며,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결과 프랑코측의 CR. 42과 He-51이 상당히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군의 전투기는 Ki-27인데 이것은 단엽기이기는 했지만, I-16에 기술적으로 뒤진 기종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격추된 소련군 전투기의 대부분은 구형 복엽기인 I-15인데, 일본군에게 고전하자 놀란 소련군이 I-16을 투입하여 일본군을 압도했다.

 


 


할힌골에 출동한 I-16

 

즉, 일본은 중국 이외에 다른 나라와의 항공전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던 적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연구한 책 "Airwar over Khalkhin Gol" (2010, Vladimir Kotelinikov 저)에 의하면 할힌골 전투 초기에 몽골-시베리아에 배치된 소련 공군(VVS)의 훈련도가 불충분했고, 전투기들도 모두 구식(복엽기 I-15, I-153, 그리고 실험적인 R-6이 주종)이었기 때문에 중일전쟁에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일본군 조종사에 밀렸으나, 소련군은 이후 신형 전투기들와 베테랑 파일럿을 계속 이곳에 투입해서 균형을 유지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련 공군이 일본 육군 항공대를 압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초반 전과만 가지고 일본 육군 항공대가 소련 공군을 압도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소련 공군의 비전투 손실율이 너무 많은 것을 의심당해서, 공군 지휘관 몇명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NKVD 부장 베리야에 의해 숙청당했다. 지못미..

 


한편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할힌골 전투 당시 23개 중대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그 중 85%인 20개 중대를 투입했고 그 중 절반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특히 후반부에 피해가 집중되었는데 초반에 일본군을 경시하던 소련에서 후반기에는 유럽방면에 주둔하던 일류 조종사들을 데려온 것이 주원인이었다. 덕택에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보다는 조종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제대로 된 교훈을 얻었고 그 덕에 조종사 보호장치가 육군기에는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바로 도조 히데키. 도조 덕에 수십만명의 육군 장병이 거름이 된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해군은? 그냥 제로센.

 

 

할힌골에서 맹활약한 BA-6 장갑차. 장갑차지만 탑재한 45mm 포는 대전차포였으므로 89식의 57mm 곡사포와 달리 대전차전이 가능했다.
 

 

노획한 BA-6 장갑차와 ZIS-5 트럭을 5톤 포병용 트랙터로 견인하는 일본군

 

 

노획한 95식 전차를 검사하는 소련군 전차병들.

 

 

노획한 95식 전차를 검사하는 소련군 전차병들.

 

 

할힌골 전투 당시의 소련군과 BT-7 고속전차.

 

•당시 일본군 주력 전차이던 89식 중전차는 대전차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차가 아니었다. 주포인 57mm 곡사포는 대전차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관통력 자체는 보병포답게 극악이었으나, 역시 워낙 종이장갑으로 악명 높은 BT(전차)나 T-26을 표준 교전거리보다 약간 안쪽인 500m 내외에서 격파하는 데 딱히 문제는 없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표준교전거리에서 제대로 맞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탄의 산포도가 넓은 단포신 포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89식 중전차는 종이장갑 BT 전차를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비해 처음부터 대전차전을 염두에 둔 탓에 37mm 대전차포를 주포로 탑재한 95식 경전차 하고는 비교적 수월하게 BT전차를 상대할 수 있었다(일본군의 전차 개발사상에서 경전차는 영국의 순항전차나 소련의 기병전차(예를 들어 BT 전차)와 마찬가지로 적 기갑부대와의 교전 및 신속한 추격전을 염두에 둔 다목적 전차였다). 물론 일본군의 37mm 대전차포는 동급 대전차포 중 최악의 대전차능력을 자랑해서 BT 전차의 45mm 주포보다 사정거리가 짧고 위력도 심하게 부족하긴 했지만, BT 전차도 종이장갑이고 철판의 재질도 안 좋아서 일본군 전차인 89식이나 97식이 이 당시만 해도 BT 전차보다 방어력이 좋았고 방어력이 매우 낮은 95식 경전차조차 BT 전차와 대등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이므로 95식 경전차의 포탄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데다, 당시 소련군 전차병의 숙련도보다 일본군 전차병의 숙련도가 더 높았던지라 95식 경전차는 의외의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물론 95식 경전차도 제대로 된 전과를 올리려면 500m 이내로 급속접근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형세를 뒤집을 결과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관광당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관동군은 전차 손실을 보충해 계속 싸워보자는 생각은 안하고 전차부대를 그냥 전선에서 빼버린지라 결국 제대로 된 대전차포도 없는 일본군 보병들은 소련군에게 갈려 노몬한의 거름이 되어버렸다.

 

•전차들은 철수했고, 대전차포는 부족한 일본군은 몰려오는 소련군 전차를 알보병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 전차들의 피해는 일본군 참호들을 돌파하면서 늘어났는데, 참호에 사각지대가 많다보니 그것을 노린 대전차포나 일본군의 화염병 투척에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소련군 전차부대가 보병들과 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들의 피해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으로는 전차부대의 진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소련군도 인명피해 만큼은 일본군과 맞먹을 정도로 크게 입었다는 것이 소련 붕괴 이후 드러나기는 했다. 당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게오르기 주코프는 공명심이 앞선 나머지 전차들만 단독으로 진격시켰다가 일본군의 대전차화망 앞에서 마구 박살나게 만들거나, 전선에 갓 도착한 병력을 축차투입하는 등 상당한 삽질을 하여 피해를 키웠다. 하지만 유럽 방면에 있던 전력을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인 몽골에까지 급속하게 이동하여 적의 공격을 사전격멸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여 관동군의 야코를 완전히 깨뜨리게 된다.

 

일본 극우들은 사상자수를 근거로 '대등하게 싸운 것이다'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라고 해야 할 판이다. 크게 보면 독소전쟁은 독일의 대승이 된다(...). 또한 일본 우익들 스스로도 사건이라고 축소하고 있으며 전투라고 인정하고 국제적으로 홍보하지도 못한다. 더구나 근래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군의 실제 사상자 수가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자료에 드러난 소련군 사상자보다 많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선 소련측 사상자가 일본측이 발표한 사상자보다 다소 많았다. 하기사 당시 일본 또한 소련과 같은 은폐가 가능한 사회였으니 가능성은 있다. 더군다나 전투의 최종 결과가 사실상 소련의 승리였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일본의 경우, 야전병원에 실려온 부상병이나 전사자는 일부 통계에서 누락했다. 전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할힌골 전투 사망자는 2만명 이상으로 기록되어 수천명에 불과한 당시 발표와는 몇배의 차이가 있다. 즉 일본군은 소련군에 캐발린 것이다.

 

 

•소련군 측 최고 지휘관들은 전투 후 공로로 각종 포상을 받았지만, 이들 중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이는 주코프 정도를 빼면 없었다. 극동군 참모장이었던 그리고리 슈테른은 전투 종료 후 주코프와 함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고 겨울전쟁 때는 제8야전군 사령관을, 그 이후에는 주코프의 후임으로 극동군 사령관을 역임했지만, 1941년 6월 트로츠키 추종자이자 나치 독일의 스파이라는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파견되어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바 있는 공군 장교였던 야코프 스무슈케비치도 이 전투에서 공군 병력을 지휘해 주코프의 조공을 맡은 공로로 두 번째 소련영웅 칭호를 받고 소련 공군 총사령관과 소련군 총참모부 부참모장을 역임했지만, 역시 1941년 6월에 날조 혐의로 체포된 뒤 총살형에 처해졌다. 베리야는 주코프도 똑같이 없애려고 했지만, 주코프는 슈테른이나 스무슈케비치처럼 당시 스탈린이 경원시했던 유대인이 아니었고 이 전투 이전부터 군부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던 인물이라 결국 숙청 대상자 목록에서 제외했다.

 

 

•일본군 제23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원인 중에는 일본군 특유의 문화도 있었다. 일본군에서는 후퇴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소련군의 포위망이 조여오는 가운데에도 제23사단의 장교들은 후퇴하자는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 행태는 임팔 작전에서도 반복된다. 일본군의 멍청함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스탈린은 승리 후 주코프를 불러들여 일본군이 어떠한가에 대해 물었고 주코프는 "사병과 하사관들은 용감하고, 초급장교들은 완강하지만, 고급장교들은 무능하다."고 평가했다. 마치 롬멜이 이탈리아군을 "이탈리아 병사는 훌륭하지만 장교는 형편없고 장군은 쓰레기다."라고 평가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츠지 마사노부는 "소관의 작전계획은 완벽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와 감투정신의 부재로 패전."이라고 대본영에 보고했다(...). 천하의 개쌍놈

 

•진짜 어처구니 없는건 이 전투에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대령이 이 전투에 있었는데

고마츠바라 미치타로와 츠지 마사노부의 대화가 진짜 가관이다.

 

야스히토 대령: 이 전투말일세. 경들은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
미치타로 중장: 물론입니다. 전하. 우리 황군이 전쟁에서 진 경우를 봤습니까?어 봤어
마사노부 중령: 전하. 원래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지는 것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야스히토가 기가 막힌듯 쳐다보고는 한마디 했다.
야스히토 대령: 그런가? 그러면 한가지만 묻겠네. 만약 경들 빼고 장교와 부사관과 병들 포함해서 전원 전사했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나? 마사노부 중령이 한 말 그대로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진것이니 두사람만 남아도 이긴것인가?

적군은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네.


그 말을 들은 츠지 중좌와 미치타로 중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장군과 육군대학 실질적 수석이었던 장교가 명목상 수석이었던 황족보다 생각이 짧았다니..... 답이 없다.

 

 

•일본군 제23사단의 피해는 막심하여 참모장 이하 연대장급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생존한 고급 지휘관과 참모들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하였다. 제23사단장 고마쓰마라는 예편된지 얼마 안 되어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적지 않은 문헌에서 고마쓰마라가 자살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전멸을 당한 제23사단을 제외하고 인접 부대와 상급 부대의 지휘관이나 참모 중에서 제대로 책임을 지는 자들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 책임 추궁을 당하기는커녕 2차 대전에 참전하였다. 모든 책임은 제23사단이 뒤집어 쓴 셈이다.

 

 

1939년 10월 강화후 포로교환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소련군-일본군 장교들

 

 

*그런데 조선인 포로가 제23사단 소속으로서 소련군에게 잡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동향인들로 사단 병원을 충원하는 일본 육군 관례에 따라 제23사단은 시마네 현 출신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인이 여기에 포함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물론 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할힌골에서도 조선인 출신 일본군 포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다른 소속이었다가 잡혔을 수도 있다. 다만 조선인에 대한 지원병제는 1938년, 징병은 1944년 시작되었으므로, 실제로 조선인이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영화처럼 재판받고 강제로 군에 입대해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조선인 지원병도 조금 뽑고 있는 상황에서 사상이 의심스런 범죄자를 굳이 최전방에 보낼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

 

 

 

•게다가 일본-소련은 전투 이후 1939년 10월 포로를 교환했고, 소련이 특별히 포로를 더 잡아둘 이유가 없었다. 소련이 2차대전후 독일과 일본의 포로를 억류한 것은 엄청난 인력손실 때문에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대숙청 직후의 1939년처럼 굴라그에도 자국 노동력이 넘쳐나던 때, 굳이 포로까지 송환하지 않으면서까지 자국에 억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포로 출신들을 자국병으로 징집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소련군은 패망 직전에도 불온한 민족(체첸이나 소련 내 독일인 자치주)들을 반란을 일으킬까봐 후방으로 강제송환하고,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해도 거부했는데, 성향이 의심스러운 일본군 포로 출신들을 자국군에 징집해서 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과연 제정신일까? 하지만 실제 이 영화의 인물은 실제로 조선 출신 관동군-소련군-독일군으로 노르망디에서 미군에 포로가 된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미국 포로심문기록에도 있으며, 다만 영화는 각색을 통했다는 것을 참고하면 된다

 

 

•마이웨이의 할힌골 전투 씬은 영화내 그나마 볼만한 부분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전투 자체는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두었다기보다는 그냥 영화적 연출로 보는게 좋다. 일단 일본군의 대전차 육탄전 자체가 실제 역사보다 더 효과적으로 묘사되었을 뿐더러, 일본군이 대놓고 밝은 아침에 평지를 건너 기습 공격을 하러 간다거나, 광활한 평지에서 소련군 전차가 대놓고 밝은 아침에 대규모로 기동하는데 일본군은 그걸 전혀 모르거나 하는 등 실제 역사의 그 막장 일본군(...)과 비교해봐도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좀 있다. 그냥 태평양 전쟁에 걸쳐서 발생한 일본군의 그 막장 대전차 공격들을 한 장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만 가치가 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무지갯빛 트로츠키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좀 과장을 섞자면 앞 분량 3/4는 할힌골 전투 이전의 일본군(특히 관동군, 그 중에서도 이시와라 간지와 츠지 마사노부)의 음모에 대해, 그리고 결말까지 1/4은 할힌골 전투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일개 흥안군 소위이긴 하지만 전장 상황에 대해서도 적절히 설명해주고, 전투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다루고 있다. 다만 같은 이유로 소련 쪽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이 한계. 그래도 당시 일본군의 안습한 상황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동시대를 다룬 개념 시대극에서는 반드시 언급되는 사건, 인간의 조건의 작가의 전쟁과 인간에서는 상당히 비중있고 안습하게 사건이 묘사된다.

 

할힌골 전투에 참전한 일본 육군 항공대 조종사들. 나카지마 Ki-27이 주력이었다.

 

할힌골 들판의 일본군 보병. 일본군이 소련제 DT기관총을 들고 있다.

 

 

작전회의를 하는 일본군 전차병들. 89식 중전차

 

•2차대전 미니어쳐 게임 Flames of War에서 추가된 일본군 시나리오가 이 전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강제징병에 논란이 되는 부분은 44년 일본이 망하기 직전에야 공식적인 강제 징병이 이루어졌다는것이다.
그 전에 학도병이나 기타등드의 방법으로 자원입대형식을 취하였는데 일본인들도 사상범,불온불순분자,범죄및 전과자,제 2국민 으 로 분류되는 국민은 황군의 자격이 없다고 하여 징병대상에서 제외됐다.

 

 

거기다 식민지에서의 징병도 창씨개명자나 일본국에 충성하는자 또는 추천또는 군사학교이수자(장교등) 징용자중 군속(징용/징병자들 대부분은 전투보다는 건설 노동 경비등 군무원신분)으로 복부하는경우가 많았다.

 

 

고로 극중 장동건이 강제입대하는 경우는 불가능.

출처 : 부산촛불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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