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부마항쟁 당시 계엄령이 떨어지자 포고문을 시민들이 읽고 있다
민중의소리
자료원문출처
부마항쟁 30년, 노동빈민의 도시 봉기
[10월의 노동자 역사] 79년 부마항쟁
2009-09-30 16시09분 김 원(한내 연구위원)
http://cmedia.or.kr/news/view.php?board=news&id=3604&category1=1
부마사태, 폭동, 계급전 그리고 민란
YH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함께 유신 체제 붕괴를 촉발시킨 결정타는 그해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였다. 하지만 당시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대중시위는 흔히 ‘부마사태’라고 불리며 왜곡되어왔다. 당시 신문들의 기사는, “대학생들 시위로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 불순분자 경거망동 발본”, “폭동에 가까운 방화?파괴 이틀, 현장에 사제총기 배후에 조직세력 있는 듯”, “공공건물 파괴 등 18~19 이틀 소요” 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배후설과 달리 항쟁을 관찰했던 미대사관의 보고서를 보면, '시위의 기본적인 원인은 경제적인 것이다, 계급전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 조차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를 ‘민란’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부산, 마산 양 지역에서 첫날 야간시위부터 시위주동자는 이른바 ‘유격대’라 불리는 20대 초반 젊은이들이었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부산에서는 “17일까지 끝까지 투쟁한 사람들은 서비스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 룸펜, 빈민, 노동자”였고, 마산의 경우에도 “앞장서서 시위대열을 이끈 것은 깡패들이었다. 항쟁의 지도자는 그들”이었다. 특히 79년 당시 마산의 거주형태는 한국전쟁 시기에도 파괴되지 않았던 전통적 도시 형태였기 때문에 뒷 골목이 발달되어 있어, 시위가 확산되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 이전,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자본축적의 내적 모순이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되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특히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는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고,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과 함께 1979년 4월 긴축 등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화정책’, 즉 한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안정화정책은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더욱 부채질하여 부도율이 사상최고치로 치솟고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하층민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부산의 경우, 1979년에 들어서면서 부도율이 전국의 2.4배, 서울에 3배에 달했고, 9월 당시 24개 업체가 휴·폐업 상태였고 6천여 명이 실업상태였다. 마산 역시 9월 당시 24개 업체가 휴·폐업했고, 5천~6천여명이 실업상태였다. 하지만 살기가 어렵다고 대중들이 곧바로 들고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면, 4일간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는 어떤 의미인가?
부산 시위의 기층 주도성 : 때미리, 식당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먼저 부산지역의 경우 초기 투쟁은 부산대 학생들이 주도했으나 야간시위에 이르자 시위대는 화이트 컬러, 노동자, 상인, 업소 종업원, 고교생들이 동참했다. 17일에는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상태 자유노동자, 무직자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부산시경 보고서에도 데모의 특이양상으로 “20세 전후 불량성향자 대학생 가장 합세(때미리, 식당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 시민들 박수/음료수 공급 등 데모학생 동조 고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16일 22시 항쟁에서 학생의 비율은 5퍼센트에 불과했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대 학생들의 시위
1979년 10월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항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권력 정당성이 취약해져 있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투쟁의 양상과 관련, 16일 오후 학생중심의 시위는 방어위주였으나 밤이 되자 시위는 점차 공격적으로 변했고 구체적인 목표물을 정하고 차례로 파괴?방화하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16일 밤 시위대는 언론기관 한곳, 파출소 11곳을 공격했고 특히 6시 이후에는 공권력의 상징인 도청, 경찰서, 세무서 등에 대한 방화, 공격이 이뤄졌다. 8시 40분경에는 5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벽돌·돌멩이로 남포파출소를 파괴하고 뒤따라오던 순찰차, 작전차를 전소시켰다. 또 16~17일 양일간 습격 받았던 언론 기관은 부산문화방송, 한국방송공사 부산방송국, 부산일보사였는데, 16일 오후 5시 40분 언론의 취재차량이 최초로 공격의 대상이 된 뒤 언론사에 대해 학생, 시민들의 돌이 화살처럼 날아들었고 “뭣하러 여기 왔느냐”는 질타가 가해졌다. 이들 기관에 대한 공격은 막연한 분노라기 보다, 유신 체제 하에서 언론 기관이 보여준 왜곡 보도 등에 대한 나름대로 판단에 근거, 선별적인 기준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 부산 시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사실은 첫째, 시위대에 의해 도청, 경찰서, 세무서, 방송국, 신문사 등 공공기관이 파괴됐다는 사실이다. 17일 야간에 시위대는 언론사 3곳, 경남도청과 중부세무서, 경찰서 2곳, 파출소 10군데를 공격했다. 둘째, 시위군중이 야간에 ‘유격대’같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주로 공공시설을 하나하나씩 파괴했다는 점이다. 투쟁 의제와 투쟁 양식에 있어서 공권력, 언론, 실업, 조세 등이 다양하게 제기되었고, 시위 양상도 파출소와 경찰차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 공격, 관공서, 세무서, 언론사에 대한 투석 등 이전 거리 시위와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었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에 주둔한 계엄군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김탁돈(사진가)
자료출처: 국제신문 http://www.pusannews.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0902.22005203011
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시청 앞으로 진출한 계엄군의 탱크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269023.html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시위 군중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3813984
마산 : “죽여라”, “불 꺼라”, “잘먹고 잘살아라”
마산지역에서 투쟁도 경남대에서 200여명 학생들의 투쟁에서 출발했지만 처음부터 단순 시위의 차원을 벗어나는 봉기의 길로 나아갔다. 또한 투쟁에서 학생들의 비중이 부산보다 취약했고, 대부분 요식업소 직원, 군소업체 종업원 등이 중심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길목이던 자유시장, 3.15 의거탑에서 교통이 정지되고 도보로 집에 가야하는 상황은 승객들을 자연스럽게 시위에 합류했다. 구체적인 자료를 보면, 10월 18일 연행자 가운데 전체 297명 중 학생은 40명에 불과했고 공원 73명, 근로자 8명, 기타 남자 63명, 무직 남자 25명이었고, 같은 날 영장 신청자 명부를 보더라도 전체 41명 가운데 공원, 종업원, 무직 등 도시하층민의 숫자가 21명에 이르는 것 역시 이를 증명해 준다. 당시 증언을 보면, “그때의 시위대를 이끈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괴성을 지르고 파출소 유리창을 다 두드려 부수고 불을 질러버리는 사람들은 깡패들이었으며, 10대의 인쇄소와 철공소와 자동차 정비공장의 견습공들이었으며, 구두닦이, 술집 웨이터들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투쟁의 강도에서 마산에서 투쟁은 격렬했다. 공공기관에 대한 파괴, 방화는 가히 밑으로부터의 대중봉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일간신문에서는, “이번 소요의 특징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폭동에 가까운 소요였고 방화파괴 등이 자행됐으며 화염병, 각목 등이 사용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적인 예를 들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 경찰서 공격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북마산파출소(오후 11시30분)와 회원동파출소(오후 9시)에 대한 공격이었다. 특히 북마산파출소 방화는 독재를 상징하는 건물이었기에 더욱 격렬했다. 시위대는 북마산파출소가 불이 나는데도 “죽여라!”라며 고함을 질렀으며, 회원동파출소의 경우 파출소에 불기둥이 오르자 환호성을 지르며 동네주민들도 몰려나와 구경했다. 특히 시위대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시내 소등(消燈)을 강제해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는데, 당시 증언을 보면 “ ... “불꺼라!” 전등을 끄지 않은 길가 집으로는 돌멩이가 날아갔다. 불을 끄지 않은 차는, 특히 자가용 차는 바로 헤드라이트를 발로 차서 깨버려서 암흑천지로 변해서, 누구도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비로소 마산은 독재의 공권력이 맥을 추지 못하는 자유의 해방 공간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더 이상 독재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마산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부유층’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이었는데, 시위대는 동성동에 있는 국회의원 박종규의 집으로 몰려가 “박종규 개새끼, 죽여라!”라고 외치면서 2층으로 된 호화주택을 돌팔매질로 박살냈으며, 10월 18일 저녁 8시경 부림시장 상가 대형직물판매센터의 셔터를 몇 명의 청년들이 격렬하게 발길질을 했다. 그 이유는 이 상점들은 많은 재산을 가진 부유층들의 소유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도로변의 샹들리에가 켜진 고급주택, 고층건물에 맹렬히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시위대는 마산시청 맞은편에 있는 세무서를 향해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부가세를 없애라”, “잘 먹고 잘 살아라”고 외치면서 돌을 던졌다. 이는 일종의 조세저항이었는데, 부마항쟁의 주요원인 가운데 하나는 세금의 과중한 징수였다. 부가세 확정 신고 마감일인 10월 25일을 며칠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 이런 일련의 불만은 세무서 공격, 시위대에 대한 시장 상인들의 지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부마항쟁 당시 마산에 투입된 공수특전단.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마항쟁 당시 마산에 투입된 공수특전단.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9 그리고 2009 : 부마항쟁 30년
한국 사회에서 항쟁은 빛나는 투쟁의 역사를 기억하기도 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대 상이 지나치게 단순화되거나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차단되기도 한다. 매번 망월동 신묘역에서 느끼는 쉽게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87년 6월 항쟁이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전유되는 것을 바라보면 늘 마음이 무겁다. 어떤 경우 차라리 '항쟁'이라는 사건의 무거움이 항쟁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거나, 항쟁을 화석화시킨다면 차라리 사용하지 않는게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물론 모든 역사쓰기, 특히 대중운동을 역사 서술화한다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특정한 정치적 기획 하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경합하고 대중 속에서 의미를 확보하는 '언어와 의미의 전장'이다. 79년 부산과 마산에서 노동빈민들이 주도했던 대규모 시위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시 화석화될 수도 있는 항쟁 대신 굳이 노동빈민들의 '도시봉기'란 말을 내가 사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 사진 동영상 영화 ◈ > ▷역사 자료 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백년전쟁 스페셜 에디션] 프레이저 보고서 1부 - 풀버젼 Full version (0) | 2018.03.31 |
---|---|
[스크랩] 한국민주화운동사 - The Dynamic Development of Korean Democracy (0) | 2018.03.31 |
[스크랩] 1987년 6월항쟁 (0) | 2018.03.31 |
[스크랩]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0) | 2018.03.31 |
[스크랩] 전두환 정권, 그리고 방송 I 각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0) | 2018.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