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태풍 산바가 지나간 이 시간 그저 모든게 조용하다.
뉴스에서는 산바가 많은피해를 남기고 강릉 앞바다로 빠저 나갔다네.
여러해 동안 매년 태풍이 지나가지만 지금부터 50년도 훨신 더 넘은 사라호 태풍을 잊지못한다.
1959년 9월 17일 음력으로 팔월한가위(8월 15일)날 아침 (초등학교 5학년때)
마루에 제사상을 차리고 제주인 내가 막 초헌의 잔을 올리고 두번절할려는 찰라.
눈 깜짝할 사이 평풍과 제수상이 펑 날라가버리고 폭우가 들어치는데~~~~우하~~어어
마루에서 방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한지문이 물에젖어 방안에까지도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다.
마당의 몇그루 감나무는 쓰러진지 오래고 장독대 옆으로 뒷산에서 내려오는 흙탕물이 대번에 마당에 차고넘어.
유동댁 보담댁 집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또 도랑옆의 감실댁 그 큰 포구나무가 바람과 맞서고 있다. 어~~이거 큰일났구나.
동네가 온통 쑥대밭이고 문전옥답에 물은공급하는 저수지가 둑이 터저 수확을 앞둔 논밭이 돌밭으로 변했다.
무엇보다도 가을 수확기를 앞둔 오곡 백과를 너나 할것없이 다 떠나보낸것이다
다행인것은 다른집에 비해 우리집은 그런대로 원형을 보존한게 다행이다.
당시에는 정보를 접할수가 없어 모든게 궁굼하다.
추석다음날 사발통문에 의하면 낙동강둑이 무너질 염례가 있다며 모두들 가벼운 먹을거리와 짐을사 뒷산으로 피신하다.
산에서본 하남펑야는 벼는 다 쓰러젔고 불어난 낙동강물에는 어디서 흘러오는지 집체 돼지등 가축이 떠내려간다.
모두가 쓸고간 뒤 남은것은 허탈이며 어떻게 살아갈것인지 한숨뿐이었다.
대사동 앞 화천을 보수한는데 지게지고 하루 나가면 깡냉이 2되를 주는데 어린이와 부녀들은 그나마 한되다.
나뿐만 아니라 왠만한 집의 학생들은 학교를 결석하고 부녀들도 이놈의 깡냉이 받으러 이 일에 동원되다.
1959년 9월 15일 서태평양 북마리아나제도 남부의 사이판섬 해역에서 발생해 일본 오키나와[沖繩]를 거쳐 17일 한반도 남부에 막대한 해를 입히고 다음 날 동해로 빠져나가 소멸한 태풍이다. 최대 중심 풍속은 초속 85m, 평균 초속은 45m, 최저 기압은 952hPa(헥토파스칼)을 기록하였다. 이는 1904년 한반도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태풍으로, 2003년 발생한 태풍 매미에 비해 최저 기압(950hPa)만 높을 뿐이다.
한반도에는 9월 17일 새벽 도착해 남해안을 거쳐 통영·대구·영천·영덕·청송·안동·경산·청도·달성 등 특히 경상남북도 지역에 막대한 해를 입히고 이튿날 동해로 빠져나간 뒤 소멸하였다.
평균 초속 45m의 강풍에 폭우까지 겹쳐 해안 지역에서는 강력한 해일이 일어나고, 강이 역류해 남부지방 전역의 가옥과 농경지가 물에 잠겼다. 곳곳의 도로가 유실되고 교량이 파손되었음은 물론,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피해 규모는 사망·실종 849명, 이재민 37만 3459명이 발생하였고, 선박 파손 1만 1704척 등 총 1900억 원(1992년 화폐가치 기준)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