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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67 박정희권력에 짓밟힌 영남대학교전신 청구대학&대구대학 이야기

허 공 2018. 3. 31. 16:08

참고자료

1.교수신문 청구대학

http://www.kyosu.net/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254&view_type=sm

2.박근혜 '전두환 6억', 정말 은마아파트 30채 값일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10462&PAGE_CD=ET000&BLCK_NO=1&CMPT_CD=T0000

3.2006년 사학법 재개정 날치기 통과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01744

4.군사정권이 뺏은 '장물' 영남대, 박근혜는 어떻게 사유화했나?
박정희 사후 29살 나이로 이사장 취임...8년 이사로 재임하며 각종 재단 비리 난무

http://www.vop.co.kr/A00000567480.html

5.박근혜가 배운 건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4276.html

6.민주 “박근혜 일가 재산 1조3천억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3411.html

■ 문재인 후보쪽이 밝힌 박 후보 일가의 재산내역

1. 박근혜 후보 본인 재산

 

△삼성동 자택

 

1982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성북동 자택 무상취득

 

1990년 장충동 집 매각

 

※ 2012 공직자윤리위원회 신고 재산: 21억8100만원

 

△79년 청와대 비서실 금고에서 발견한 박정희 비자금 9억 5천만원 중 6억원 수수

 

※ 79년 강남 은마아파트 평당 분양가는 68만원, 30평짜리 아파트 30채 가격

 

 

2. 박근혜 후보 직계 형제

 

동생 박지만씨와 올케 서향희씨의 2004년 결혼식에 참석한 박근혜 후보. 사진공동취재단

△박지만·서향희 재산(1134억원)

 

EG지분 1,107억원(주당 5만1500원, 11.27 종가)

 

부동산 : 강남구 청담동 59-21 청담파크빌 1102호: 매매가 27억원

 

△박재옥(박근혜 이복언니), 한병기 일가(총 3483억원)

 

한병기·박재옥+자녀 한태준·한태연·한유진

 

-설악케이블(한태준·한태연): 162억 40만 3323원(장부상 기업가치 평가총액)

 

-대유신소재(박영우·한유진): 1577억 1990만 6700원(주식 시가)

 

-동강홀딩스(박영우 등): 322억 552만 9137원(장부상 기업가치 평가총액)

 

-대유에이텍(박영우 등): 1346억 3698만 7485원(주식 시가)

 

-스마트저축은행: 76억 482만 6242원

 

 

3. 박근혜 후보 친인척 재산(외사촌 일가 중심)

 

△정영삼·홍지자+자녀(정원석·정우석·정혜신) (7855억원)

 

조원관광(한국민속촌): 1,932억(장부상 기업가치 평가총액+부동산 실평가액)

 

금보개발: 2429억 (장부상 기업가치 평가총액+부동산(남부컨트리클럽) 실평가액)

 

(주)더원: 1800억원 (장부상 기업가치 평가총액+부동산(에코랜드 테마파크, 골프장) 실평가액

 

나우테크: 271억 9409만 755원 (장부상 기업가치 평가총액)

 

서우수력: 410억 1394만 2066원(장부상 기업가치 평가총액)

 

농업회사법인 동주물산: 220억 8789만 9160원 (장부상 기업가치 평가총액)

 

정혜신(남편 허용수, GS일가) 자녀 허석홍·허정홍 보유 GS 주식 시가

 

-허석홍: (주)GS 주식 79만 341주/ 시가 565억 938만1500원(2012.11.2 종가)

 

-허정홍: (주)GS 주식 32만 1천주/ 시가 229억 5150만원(2012.11.2 종가)

 

△홍세표(육인순·홍순일 장남) : 학교법인 혜원학원 부동산: 981억 9천만원

 

 

4. 박근혜 후보 영향하의 강탈 재산(2조 8223억원)

 

서울 중구 정동 정수장학회 입구에서 관계자들이 들어가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정수장학회 (7474억원)

 

MBC 문화방송 지분 30%(6만 주): 6천억원 상당

 

부산일보 지분 100%(20만 주): 자산총계 880억원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부지 2384㎡ 및 건물: 약 394억원(감정평가액)

 

예금자산 200억원

 

△영남학원 보유 부동산(1조4565억원)

 

영남대 본교: 1조 2565억원

 

영남대 제2캠퍼스: 1999억 4천만원

 

△육영재단 부동산 : 6147억원

 

박근혜 일가.친인척 재산 총계: 약 1조 3000억원

 

박근혜 영향하의 강탈재산 포함시 : 약 4조원

 

박근혜 일가 소유 및 강탈재산 부동산 580만㎡(여의도의 2배)

 

△한국문화재단 기본재산→육영수기념사업회: 기본재산 37억원

 

7.이정희 “영남대서 비리로 쫓겨난 박근혜, 반값등록금 의지 없어”

http://www.vop.co.kr/A00000573031.html

8.“지원 없고 사사건건 간섭만 늘어 사학 枯死위기 더 이상 못 참겠다”
‘사학법 재개정’ 요구 분출… 대선 쟁점화  (신동아)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2/10/22/201210220500037/201210220500037_1.html

 

9.박근혜 반값등록금 공약 이행은 언제?

http://www.vop.co.kr/A00000572923.html

 

 

 

자료출처:대구대학(1947년)

대구대학(大邱大學)은 1947년 대구에 설립되었던 사립대학이다. 설립자는 최준이다.
1967년 청구대학과 통합되어 영남대학교로 개편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A%B5%AC%EB%8C%80%ED%95%99_(1947%EB%85%84)

 

대구대학(1947년)은 현재의 대구대학교와 다른학교 입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A%B5%AC%EB%8C%80%ED%95%99%EA%B5%90

 

 

1945년 10월 대구대학 전신 경북종합대학 기성회 조직, 회장 최준 취임
1947년 3월 경북종합대학이 가칭 대구문리과대학으로 개교 (2년제 예과(문과·이과), 3년제 전문부(법과))
1947년 9월 재단법인 대구대학 설립 인가
1947년 10월 영문학과·법학과·정치학과·경제학과·응용화학과 6개 학과로 개강
1948년 9월 초대 학장 조용기 취임, 교사를 대봉동 대구중학으로 이전
1950년 4월 예과 초급대학 부설
1951년 4월 교사를 포정동 청구대학 구내로 이전, 향교재단과 합류하여 공동 운영
1952년 3월 부설 초급대학 폐지
1952년 5월 교사를 남산동 향교 구내로 이전
1954년 12월 대명동 신축 교사로 이전
1957년 6월 본관 준공
1958년 3월 대학원 설치, 재단법인 대구대학이 문파교육재단을 통합, 병설 대구여자학숙 설립 인가
1958년 4월 병설 대구여자학숙이 문과·상과·가정과·보육과로 개교
1961년 1월 병설 대구여자학숙을 대구대학에 통합하여 상과·문과·가정과·보육과·회계과를 가진 여자부로 개편
1962년 2월 여자부 국문과·상과·가정과를 병설 여자초급대학으로 변경
1964년 1월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변경
1964년 10월 동양문화연구소, 기업경영연구소 및 천연물화학연구소 개소
1967년 12월 청구대학과 통합되어 영남대학교(학교법인 영남학원)로 개편

 

청구대학(靑丘大學)은 1948년 대한민국 대구에 설립되었던 사립대학, 근로자 교육기관이다. 한국의 교육자 최해청과 에스페란티스토 홍형의가 주도하여 1948년 근로자 교육기관으로서 설립되었다.

자료출처:http://ko.wikipedia.org/wiki/%EC%B2%AD%EA%B5%AC%EB%8C%80%ED%95%99

1967년 대구대학과 통합되어 영남대학교로 개편되었다.

1948년 5월 대구야간대학 기성회 조직, 장인환 회장 선임
1948년 9월 대구문리과전문학원 인가
1948년 11월 종로 임시교사 개교, 원장 최해청 취임
1950년 3월 포정동으로 교사 이전
1950년 4월 재단법인 청구대학 설립 인가, 이사장 정종수, 학장 최해청 취임
1952년 5월 주간부 설치
1953년 3월 제1회 졸업생 배출 (49명)
1955년 8월 문화동으로 교사 이전
1961년 4월 공학부 효목동 신축 교사 이전, 대학원 설치
1962년 2월 병설 실업초급대학 설립
1963년 1월 병설 공업고등전문학교 설립
1964년 3월 대학본부를 30여만 평의 효목동 교사로 이전
1967년 12월 대구대학과 통합되어 영남대학교(학교법인 영남학원)로 개편 (총 14회 3,459명의 졸업생 배출)

"박근혜씨 만나 뭐가 문젠지 알려주고 싶다"

 

"각하! 대통령을 백년 할 수 있습니까"
권력에 짓밟힌 '독야청청'의 청구대학

[발굴/박정희와 영남대-상] 청구대 공중분해와 영남대 탄생

04.08.03 15:18l최종 업데이트 04.08.12 14:19l이승욱(baebsae)

자료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1806

(최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이 논란이 된 가운데 박 대표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이른바 '장물유산'들이 새삼 거론되고 있다. 정수장학회에 이어 영남대학교도 그 하나로 일부 대구지역 언론에서 이미 이 사안을 거론한 바 있다.

<오마이뉴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주(校主)'로 있는 대구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학의 설립 비화, 청구대가 박 정권에 의해 대구대와의 합병으로 영남대가 된 과정, 청구대 설립자 고 최해청씨 아들의 증언, 박정희 사후 그의 자녀들의 영남대 되찾기 등을 상-하 두 차례에 걸쳐 집중보도한다... 편집자 주)



▲ 청구대 설립자 야청 최해청
야청(也靑) 최해청(崔海淸·1905~1977). 그와 그가 건립한 '청구대학'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구지역에서조차 그리 많지 않다. 그가 건립한 청구대학이 지난 1967년 박정희 정권 시절 '공중분해'된지 이미 40년 가까운 긴 세월이 흐른 탓이다.

청구대학의 '흔적'은 당시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 합병돼 건립된 '교주(校主) 박정희'의 <영남대학교 50년사>(97년 발간)에서만 '어렴풋이' 묻어난다. 37년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청구대학과 창립자 야청 최해청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등장하고 있다.

'독립운동의 생활화' 청구대학의 창건 과정

청구대학은 해방 이후 야청이 시국을 걱정하는 모임인 '삭망회'(朔望會)를 조직할 당시 대구시보사(大邱時報社) 장인환 사장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1947년 3월 야청은 대구시보사의 독립운동국장으로 취임했다. 독립운동국은 "해방 기운은 식어들고 일제잔재가 고개를 든다"며 탄식했던 야청과 장 사장이 '독립운동의 생활화'를 기치로 만든 기구.

야청은 독립운동국을 기반으로 대중학술 강좌를 열고 당시 세계어 '에스페란토' 강좌를 포함한 대중강연을 개최했다. 에스페란토는 그가 아나키즘에 심취해 대구고보 시절 처음으로 접했다. 그가 준비한 대중강연은 성황을 이뤘는데 그가 청구대학 설립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 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48년 5월 30일 금호강 무태강변에서 '열성적인' 학생들과 지역유지들이 참석하는 야간대학 기성회를 발족하고 대학 창건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청구대학의 모태가 된 대구문리과전문학교를 인가받아 학생을 모집해 개학을 맞게 되는데 바로 1948년 11월의 일이었다.

이후 야청은 1950년 4월 25일 재단법인 청구대학을 인가받아 야간대학으로 발족시켰다. 야청은 청구대학의 이사겸 학장으로 취임한다.

청구대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1955년 대구 중구 문화동으로 교사를 이전하는 등 최고의 절정기를 이룬다. 야간대학이었던 청구대학은 특히 사정상 고등학문을 배우지 못한 늦깎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61년 초반 청구대학은 문리과대학 이외에도 청구공전·청구중고등 등으로 명실상부한 학교재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야청 최해청과 박정희의 첫 만남

하지만 1950년대 황금기를 이룬 청구대학은 60년대로 접어들며 위기에 봉착한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소위 '대학정비과정'을 주도했는데 이 때 청구대학은 4년제에서 2년제로 격하되었다.

2년제로 격하된 청구대학은 야청에게 위기감을 안겨줬다. 청구대학이 2년제로 격하된 것은 학교 교사 등 물적 설비가 부족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그는 설비 정비에 들어갔고, 이어 전국대학생 재고사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청구대학은 4년제로 회복하게 되었다.

▲ 야청 선생과 청구대학을 둘러싼 역사가 담긴 책들. <청구증언>은 야청 선생의 차남 찬식씨가 1997년 야청의 유고인 <청구유언>과 일기 등을 토대로 펴낸 책. 사진 왼쪽 <야청 최해청 선생>은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선생의 업적을 기려 발간한 책이다.
야청이 박정희를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1961년 6월로 이후 그는 박정희와 빈번히 자리를 함께 했다. 박정희는 야청에 대해 여러가지 자문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만 해도 야청은 '군사혁명'의 필요성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타계할 시점에서 작성한 유고 <청구유언(靑邱有言·77년)>에서 그런 점이 엿보인다.

"...5·16의 성과는 선두에 내건 '혁명공약'에 있었다고 할까. 무엇보다 모든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 참신한 기풍으로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데 일단 수긍이 갔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등장은 청구대학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줬다. 청구대학의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한 출혈이 컸던 것 때문이다. 게다가 재단 경리직원들의 비리사건이 빚어지면서 재정난은 가중됐고 이는 야청에게도 치명타가 됐다. 경리직원들의 비리사건를 야청이 모두 떠맡아야 했던 것.

재단에서 '축출'... 학장에서 쫓겨난 설립자

직원들의 비리를 둘러싼 책임 공방은 재단 내 반대파에겐 '좋은' 빌미가 됐다. 설립자 야청이 영입한 재단 이사들이 '반란'을 획책한 것. 1966년 12월 재단 이사회는 야청이 학장직을 물러나도록 결정하고 만다.

<영남대학교 50년사>는 당시 상황을 '권고'라고 서술하고 있지만 야청은 당시 자신이 쓴 일기속에서 '강압에 의한 퇴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야청은 부채문제에 대해 '충분한 실사'를 한 후 퇴진을 하더라도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같은 계획은 묵살되고 '명예학장'과 '외톨이' 이사라는 허울만 갖게 됐다.

청구대학의 존재 기반을 흔들어놨던 사건은 이른바 '교사 붕괴사건'이었다. 야청이 일선에서 물러난 후인 1967년 6월 15일 청구대학 Y자 교사 신축공사 현장에서 건물이 붕괴된 것. 수 십명의 사상자가 난 청구대학 교사 붕괴사건은 당시만하더라도 전대미문의 대형참사였다.

붕괴사건은 이 대학 설립자였던 야청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이 붕괴사건은 일선에서 물러난 야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애초 3층 높이로 짓기로 한 건물을 새로운 경영진이 무리하게 5층 높이로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공격의 화살은 야청에게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청구대학에 박정희라는 최고권력자의 영향력이 뻗치기 시작한 발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새 경영진은 사태를 수습하기 보다는 군사정권에게 '사죄'를 청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나섰다. 그리고는 대학 설립자에게는 일언반구 없이 마치 '임금'에게 진상품을 갖다 바치듯 청구대학을 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한 사람은 시조시인이자 전 청구대학 교수였던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想·1903~1982)이었다. 설립자 야청과 노산의 관계는 아이러니하다. 과거 노산은 '독야청청(獨也靑靑)'에서 '야청'을 따 그에게 호를 지어줄만큼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였다.

▲ '새역사 창조자'- 야청 선생이 세운 청구대학의 모토가 담긴 비석. 애초 청구대학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영남대로 옮겨져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노산, 박정희 면담... "대통령 백 년 할 수 있나"

당시 노산의 역할은 <영남대학교 50년사>에도 자세히 기술돼 있다.

"신축교사가 붕괴되어 수많은 사상자를 냄으로써 학교는 더 지속될 가망이 없었다. 숨막히는 고비를 수없이 겪은 어느날 최해태 학장과 나(심재완)는 우연히 일치된 묘안을 생각해 보았다... 직접 맡을 사람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맡아달라고 간청하면 맡아주지 않을까... 제안을 들은 이은상은 한 달이 지난 후... 다시 한 달 후 이은상은 청와대 면담 이야기를 학장실에서 학장과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은상은 '대통령을 백년 할 수 없는데, 그만두면 빗자루 들고 돌아설 생각은 해보았는가? 회사 사장이 될 수 없고, 외국에서는 대학총장을 하는 일을 많이 보았는데 가장 떳떳한 일 같은데?'로 시작하여 그 능란한 말솜씨로 두 시간 동안이나 우리가 제시한 이야기를 펼치니 대통령이 수긍하더라는 전언이 있고 난 뒤..."


청구대학과 설립자 야청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진상' 소식을 전해들은 야청은 박정희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전까지 자신을 대하던 모습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박정희의 신속한 청구대학 '접수'... 이후락 실장이 '현장 지휘'

박정희의 청구대학 '접수'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그 실무역할은 이후락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맡았다. 박정희에게 청구대학을 '진상'한 뒤인 1967년 8월경 애초 이사진 5명 외에 이후 영남학원 재단이사장을 맡게 되는 이동녕과 김성곤 등이 이사로 추가되었다. 이사 명단에는 이후락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락은 이후 청구대학과 당시 지역대학인 대구대학의 '병합'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당시 대구대학은 삼성 이병철 회장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삼성은 속칭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인한 회사의 신뢰 실추를 만회하기 위해 정권에 학교를 '상납'했다.

그동안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을 멀리했던 박정희 정권은 두달 여만인 8월 15일에서야 야청을 만나줬다. 허울뿐인 명예학장이자 이사였던 야청이 만난 사람은 박정희가 아닌 그의 대리인격인 이후락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야청에게 뭘 약속했나

당시 박정희와 정권은 설립자 야청에게 무엇을 약속했을까. 자료와 증언들을 토대로 한다면 이후락이 제안을 한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무소불위의 군사정권이었지만 설립자를 회유하기 위한 전략은 필요했든 듯.

다음은 야청 선생이 남긴 자료와 그의 차남 최찬식(77)씨가 주장하는 '정권'의 제안이다.

① 박정희를 고문으로 하고 청구대학의 정신을 이어받는 '대청구'를 건설한다.
② 경리직원들이 저지른 부정경리 감사를 지속한다.
③ 야청이 이후 새로운 대학 건설에 참여하도록 한다.
④ 청구공전은 합병에서 제외하고 야청에게 맡긴다.


최찬식씨는 "당시 야청 선생은 무엇보다 자신이 부정으로부터 깨끗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면서 "부정경리 감사를 지속해줄 것을 요구한 것도 그 이유였다. '대청구'를 건설한다는데 정권의 권위앞에서 반대할 이유가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 / 이승욱 기자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락의 사무실로 사용됐던 서울 반도호텔에서 이뤄졌다. 야청은 그 날의 만남에서 '정권과 맞붙어 싸우지 못한 것'이 못내 분한 듯 자신을 격하게 나무라는 글을 일기에 남겼다.

"왜 출석여부 재고하지 않았던가... 윤 말대로 (이후락)실장 체면만 세워주면 될 줄 알았더냐... 당대 최고 권력자가 이미 (청구대학을) 먹자고 강행해서 기정 사실화 하고 나섰는데... 기왕 나갔으면 혈투를 하든지, 뿌리치고 나오든지, 물컵만 엎지르고 고성소리만..."(1967년 8월 18일 일기)

결국 같은해 12월 15일 반도호텔 927호와 삼성빌딩 505호실에서는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 각각 이사회를 열고 있었다. 이는 두 대학의 합병을 공식 결의하는 자리였다.

대구대학은 성상경·최준·이효상 이사 등이 계획대로 합병을 결정했다. 문제는 청구대학 이사회. 당시 이 자리에 참석했던 야청은 정권의 '제안'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합병의 연차적 계획과 학부형과 학생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합병에 서명했다. 이러한 그의 결정은 '자포자기'와 직원의 비리에 대한 억울한 누명을 벗고 싶다는 심정에서 비롯됐다고 보여진다.

박정희와 정권, 청구대학 '접수' 완료

▲ 옛 영남대학교 전경
ⓒ 영남대학교
야청은 유고 <청구유언>에서 서명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왜 내가 (합병)서명을 했느냐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으나, 어차피 나는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합의와 서명으로 오늘의 사태에 이른 것이 아니요, 나의 동의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일방적인 행위였다. 서명할 당시 나의 전 신경은 부정비리를 밝혀 달라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야청은 이후 박정희와 정권으로부터 더욱 철저히 외면 당한다. 정권의 약속은 한낱 '식언'에 그쳤고 1967년 12월 25일 박정희는 두 대학의 접수를 완료했다. 박 정권은 큰 충돌없이 20억(대구대학)과 15억(청구대학)을 삼키며 '무혈 입성'에 성공했다. 두 대학의 강제합병으로 영남대학교가 새로 탄생했다.

▲ 1967년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의 강제합병이 있은 후 당시 <매일신문>은 강제합병의 부당성을 알리는 사설을 게재한다. 당시 사설을 쓴 논설위원은 파면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영남대에 청구대학 설립자인 그의 자리는 아무데도 없었다. 박 정권은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당시 청구대학의 합병은 일부 신문의 사설에서 비난의 대상이 됐다. 1967년 12월 23일자 <매일신문>은 사설을 통해 두 대학의 합병을 비난했다. 그리고 두 대학의 재학생과 동창들도 같은 시기 합병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였다.

"...그런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양 대학의 건학정신을 발판으로 한다면서, 한편 대학의 창립자들이 신설재단에 자리를 같이 할 기회를 균배하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구시를 중심으로한 경북 일원의 교육개발에 기여해온 당 대학의 창건·육성자가 참여의 기회를 잃게 된 사실은 첫째 도의로 수긍될 수 없는 문제가 아니겠는가..."(大邱·靑邱 병합의 명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야청과 청구대학의 '정신'

청구대학과 설립자 야청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독립운동을 탄식하고, 청년들의 자유로운 학문탐구와 대학의 사회적인 역할을 강조하며 '독립정신'을 창학정신으로, '새역사 창조'를 모토로 내세웠던 대학과 그 설립자.

청구대학을 정권에 빼앗긴 야청은 그후 타계(77년) 할 때까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경북지부' 공동대표를 맡아 박 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말년을 보냈다. 그가 생전에 아들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는 '빼앗긴' 청구대학에 대한 미련과 슬픔이 짙게 배어있다.

"...영남(대학교)에 대해서는...그들이 나의 요구대로 기록해 줄지도 의문이고, 내가 장물학교(贓物學校)를 상대하기도 싫다.."
ohmyNews


 

 

 

 [인터뷰] 영남대 전신 청구대학 설립자 아들 최찬식씨

04.08.06 17:04l최종 업데이트 04.08.06 22:52l이승욱(baebsae)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2478

 

▲ 야청 선생이 1959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아들 찬식씨의 안내로 구라파 여행 중 로마에서 찍은 사진.
ⓒ 최찬식씨 제공
"아무리 생각해도 박정희는 무정한 인간이었다."

청구대학의 설립자 야청 최해청(77년 작고) 선생의 차남 찬식(77)씨는 최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야기가 나오자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30년 넘게 청구대학 회복 운동을 벌이고 있는 최씨는 지난 67년 영남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사라진 선친과 청구대학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로 분주했다.

그는 지난 97년 야청 선생의 유고인 <청구유언>, 일기와 편지, 그리고 각종 자료들을 토대로 <청구증언>을 펴내기도 했다. <청구증언> 속에는 청구대학의 창학 과정과 시련기, 또 영남대학교의 탄생 과정까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야청 선생이 1950년대부터 기록한 일기에서는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도 하다.

<청구증언> 펴내며 외로운 싸움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선친이 설립한 청구대학 영어 강사로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슬하에 3남을 둔 야청 선생은 둘째인 그에게 청구대학과 관련한 제반사항을 의논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그는 주로 편지를 통해 선친과 학교와 관련한 의견을 교환한다. 1958년에 발표한 청구대학의 '교육정신'도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야청 선생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법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설립자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내부 경리직원들의 비리사건으로 학교 경영의 어려움을 겪으며 고뇌를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67년 청구대학이 사라질 쯤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선친은 무엇보다 청구대학의 정신과 이름이 영원히 남겨지길 바랬다"면서 "선친이 이후락에게 마지막까지 '청구공전만을 남긴다'는 약속을 지켜라고 요구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분노를 아직도 삭히지 못했다. 청구대학을 사실상 '강탈' 당하기 전까지 박정희의 태도와 그후 모습은 '너무나 이중적이었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야청 선생 찾더니, 대학 빼앗을 땐 외면만"

"청구대학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박정희는 가끔씩 선친을 불렀다.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사회와 교육 분야에 대해 선친에게 자문을 구했다. 당시만해도 선친은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는 '혁명'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산 이은상이 박정희에게 청구대학 '진상'을 알린 후 박정희의 태도는 180도로 변했다. 선친은 단 한번이라도 박정희를 만나 청구대학의 진실을 알리고 싶어했지만 외면할 뿐이었다."


최씨는 당시 박정희의 태도 변화에 대해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박정희가 정말 무정한 짓을 했다"면서 "선친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만나 주지 않았다"고 가슴을 쳤다. 그는 "한 언론인이 야청선생을 위해 박정희에게 간청을 여 간청을 넣으니 박정희가 '그사람 내게 당신이라 하더라'며 고개를 돌린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박정희가 선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남대 탄생이 이후락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의해 주도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영남이라는 이름도 이후락 실장이 지었다는 말이 있다"면서 "대학의 강탈과 합병에서 실무는 이후락 실장이 맡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박정희가 '교주'로 돼 있는 영남대에 대해 박정희 '일가'들이 권리를 주장하는데 못마땅하다.

"도대체 박정희와 그의 일가들이 영남대를 위해 한 일이 뭔가. '상납'이라는 명목으로 강탈한 학교들을 합병하고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영남대를 세웠지 않나. 그런 박정희와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 영남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명분이 대체 뭐가 있는가."

"박근혜씨 만나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주고 싶다"

그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서도 "박근혜 대표와 동생 박서영씨는 지난 88년 국정감사에서 대학비리와 관련해 일체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끝이 난 일"이라면서 "계속 그의 일가들이 (자리를)주장을 한다면 박근혜 대표를 만나 그들의 과오를 이야기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박근혜 대표의 친척을 통해 만남을 요청한 바도 있다고 한다.

일부에서 영남대 발전에 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로'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그는 반박했다.

"박정희가 영남대 발전을 위해 공헌한 것 아니냐고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그러면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조선을 강탈했고, 식민지 통치를 하면서 그들의 필요에 의해 철도 건설하고 경제발전의 기틀을 잡았다고 독립을 원치 않을 수 있나. 바로 그런 이치다."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청구대학의 '복원'을 기대하고 했던 그는 이번 만큼은 청구대학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고 있다.

그는 "청구대학의 움씨라도 남기겠다던 선친처럼 벌써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청구의 이름과 그 정신을 되찾고 싶다"면서 "독립정신에 기초해 민족대학으로 성장했던 청구대학을 회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금 청구대학 명칭 회복과 청구대학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이사 참여 등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벌써 칠십을 훨씬 넘긴 나이. 하지만 그는 아직도 선친과 군사정권에 '뺏긴' 청구대학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 그의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한다.

"77년 선친이 돌아가실 때 제대로 눈을 감으셨겠나. 얼마나 억울한 마음이었을까. 벌써 청구대학이 사라진지 30년이 넘었다. 청구대학을 회복하는 일이 내가 선친에게 물려받은 고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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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부산촛불방송
글쓴이 : 부산촛불방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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